史記 · 本紀
진시황 본기秦始皇本紀
제6편 · 2부
분서갱유와 만리장성, 시황제의 죽음, 그리고 조고와 이세황제
01천하의 책을 불태우다
[시황] 34년, 시황제는 옥리(獄吏, 감옥을 담당하는 관리) 중 정직하지 못한 자를 보내 장성(長城)을 쌓거나 남월(南越) 땅을 지키게 했다. 시황제가 함양궁에서 주연을 베푸니, 박사 일흔 명이 앞에 나와 장수를 기원했다. 복야(僕射) 주청신(周靑臣)이 나서서 기리면서 말했다.
“예전의 진나라 땅은 사방 1000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폐하의 신묘한 영기와 밝은 성덕에 힘입어 온 세상을 평정하고 만이(蠻夷)를 쫓아 버려 해와 달이 비추는 곳이라면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어졌습니다. 제후국을 군현으로 삼으시니, 사람마다 절로 안락하고 전쟁의 근심이 없어져 만세에까지 전하게 되었습니다. 상고 시대부터 어느 군주도 폐하의 위엄과 덕망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시황제가 기뻐했다. 박사인 제나라 사람 순우월(淳于越)이 나아가 말했다.
“신이 듣건대 은나라, 주나라 왕조가 1000여 년간 다스린 것은 자제나 공신들을 제후로 봉해 자신의 버팀목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를 가지셨지만 자제들은 평민이셔서, 갑자기 전상(田常)이나 육경(六卿) 같은 신하가 나타나면 보필할 인물이 없으니 어찌 도울 수 있겠습니까? 일을 할 때 옛사람들을 본받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주청신이 눈앞에서 아첨하며 폐하의 잘못을 무겁게 하니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니옵니다.”
그러자 시황제는 대신들에게 논의하라고 하교했다. 승상 이사가 말했다.
“오제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서로 겹치지 않았고, 삼대가 서로 답습하지 않고 각자 달리 다스린 것은 서로 반대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변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폐하께서 대업을 창건하고 만세의 공덕을 세웠으니, 이는 아둔한 유생들은 진실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순우월이 말한 것은 삼대의 일인데 어찌 본받을 만한 것이겠습니까? 이전에는 제후들이 모두 다투었으므로 떠도는 선비들을 후하게 대접하여 초빙했습니다. 지금은 천하가 이미 안정되어 법령이 통일되고, 백성들은 가정에서 농사에 힘쓰고, 선비들은 법령과 해서는 안 될 것들을 익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유생들은 지금 것을 본받지 않고 옛것을 배워 이 시대를 비난하면서 백성들을 미혹하고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승상 신 이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옛날에 천하가 나뉘고 혼란스러워도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제후들이 모두 일어나서 말로는 모두 옛것을 말하고 지금 것을 비난하며 허망한 말을 꾸며서 사실을 어지럽히고 사람마다 사사로운 학문을 좋다고 함으로써 위에서 세운 제도를 비난했습니다. 이제 황제께서 천하를 합하여 소유하시고 흑과 백을 구분하여 지존(至尊, 황제) 한 분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도록 하셨사온데, 아직도 사사로운 학문으로 서로 함께 법령과 교화를 비난하고, 사람들은 내려진 법령을 듣고 각기 자신의 학문으로 그것을 의논하니, 조정에 들어오면 마음속으로 반감을 품고 조정을 나오면 길거리에서 논의하며, 군주에게 과시하여 명예를 만들고 기이한 것을 취해 고귀함으로 만들고 아랫사람을 이끌어 비방을 조성합니다. 이런 짓을 금하지 않는다면 위로는 군주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로는 붕당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마땅히 이를 금지하는 것이 이롭습니다. 신이 사관에게 명해 진나라 기록이 아니면 모두 태워 버리도록 청하겠습니다. 박사관(博士官)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가 아닌데도 감히 『시』, 『서』 및 제자백가의 저작을 소장하고 있으면 모두 군수와 군위에 보내 마구 태우게 하십시오. 감히 짝을 지어 『시』와 『서』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저잣거리에서 죽여 보이소서. 옛것으로 지금 것을 비난하는 자는 일족을 멸하십시오. 관리로서 이를 보거나 알면서도 잡아내지 않는 자는 같은 죄로 다스리옵소서. 명령을 내린 지 30일이 되어도 서적을 태우지 않으면 경형을 내린 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성벽을 쌓는 죄로 삼으십시오. 없애지 않아도 될 것은 의약, 점복, 종수(種樹) 관련 서적입니다. 만약 법령을 배우려는 자가 있다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옵소서.”
이에 진시황이 영을 내려 말했다.
“허락하노라!”
[시황] 35년, 도로를 넓혔다. 구원(九原)으로 길을 내어 운양(雲陽)까지 이르러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곧바로 통하게 했다. 이때 진시황은 함양에 인구는 많은데 선왕의 궁전(선왕 때 지은 궁전)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내가 듣건대 주나라 문왕은 풍(豐)에 도읍하고 무왕은 호(鎬)에 도읍했다 하니, 풍과 호 사이가 제왕의 도읍지이다.”
이에 위수 남쪽 상림원 일대에 궁전을 지었다. 먼저 아방(阿房)에 전전을 만들었는데, 동서로 500보(步)이며 남북으로 50장(丈)으로 위쪽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쪽에는 다섯 장 높이 깃발을 세울 수 있었다. 사방으로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을 만들어 궁전 아래에서부터 곧장 남산(南山)까지 이르게 했다. 남산 봉우리에 궁궐 문을 세워 지표로 삼았다. 다시 길을 만들어 아방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까지 이어지게 하여 북극성과 각도성(閣道星)이 은하수를 건너 영실까지 이르는 것을 상징했다. 아방궁은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완성되면 이름을 선택하여 다시 명명하려고 했다. 아방에 궁전을 지었기 때문에 천하가 그것을 아방궁이라고 했다. 또 궁형(宮刑)과 도형(徒刑, 유배형)을 받은 70여만 명을 나누어 아방궁을 짓거나 여산에 능묘를 짓게 했다. 북산(北山)에서 석재를 채취하고, 촉과 형 땅에서 목재를 운반해 관중까지 이르게 했다. 관중에 궁전 300채를 지었으며 함곡관 바깥에는 궁전 400여 채를 지었다. 이에 동해 바닷가의 구산(胊山)에 비석을 세우고 이를 진나라의 동문(東門)으로 삼았다. 3만 가구를 여읍(驪邑)으로 이주시키고 5만 가구를 운양으로 이주시켜 모두 10년간 요역을 살지 않도록 면제해 주었다.
노생이 진시황을 설득하며 말했다.
“신들이 영지(靈芝)와 선약(仙藥)과 신선을 찾았으나 늘 만나지 못했는데, 이는 무언가가 방해하는 것 같사옵니다. 방법을 생각해 보니 황제께서 때로 신분을 숨기고 다니면서 악귀를 물리치신다면 악귀가 물러나고 진인(眞人, 신선이 된 자)이 올 것입니다. 황제께서 머무시는 곳을 신하들이 알면 신선께 방해가 될 것이옵니다. 진인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구름을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 영원합니다. 지금 황제께서 천하를 다스리시나 아직은 편안하고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원하건대 머무시는 궁궐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한 후에야 아마 불사약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진시황이 말했다.
“나는 진인을 흠모하니 스스로 ‘진인’이라고 할 것이며 짐이라 부르지 않겠다.”
그러고는 명을 내려 함양 부근 200리 안에 있는 궁전 270곳을 복도와 용도로 서로 연결하고 휘장, 종고, 여인들로 채웠으며, 각각 각 부서에 옮기지 못하게 했다. 행차하여 머무르는데, 황제의 거처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했다.
진시황이 양산궁(梁山宮)에 행차했을 때, 산 위에서 승상의 [행차] 수레가 많은 것을 보고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궁 안의 어떤 사람이 알려 주어 승상이 [행차] 수레 [규모]를 줄였다. 진시황이 화가 나서 말했다.
“이는 궁 안의 사람이 내 말을 누설한 것이다.”
이에 궁궐 사람들을 심문했으나 아무도 죄를 인정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자 당시에 곁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도록 명했다. 이후로는 행차해도 진시황이 있는 곳을 알지 못했다. 정사를 듣고 여러 신하들이 정한 일을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 함양궁에서 했다.
후생(侯生)과 노생이 함께 모의하여 말했다.
“진시황의 사람됨은 천성적으로 고집이 세고 사나우며 자기만 내세우는 데다 제후에서 일어나 천하를 병탄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함으로써 예부터 아무도 자신을 능가할 자가 없다고 여기었소. 전적으로 옥리만을 중용하니 옥리는 친애와 총애를 얻었소. 그러나 박사는 비록 일흔 명이나 되었지만 인원만 갖췄을 뿐 중용하지 않았소. 승상과 모든 대신들은 이미 결정한 일들을 받아들이기만 하며 위에서 결정하는 대로 따르고 있소. 황상은 형벌과 살육으로 위엄을 삼는데, 천하는 죄를 두려워하며 녹봉에만 연연할 뿐 아무도 충성을 다하려 하지 않소. 황상은 자신의 허물을 듣지 않으니 날마다 교만해지며, 신하들은 해를 입을까 두려워 엎드려 속이고 기만하여 안락함만을 취하고 있소. 진나라의 법에는 한 사람이 두 가지 방법과 기술을 쓸 수 없으며, 효험이 나타나지 않으면 바로 사형이오. 성상(星象, 별자리 모양)과 운기(雲氣, 기상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구름의 모양)를 관측하는 자는 300명으로 모두 훌륭한 선비이지만 두려워하고 꺼리며 아첨할 뿐 감히 황제의 과실을 직언하지 않소. 천하의 일이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두 황상에 의해 결정되니 황상이 읽어야 할 문서의 중량을 저울질해서 밤낮의 분량120)을 정해 놓고 그 분량에 도달하지 못하면 쉴 수도 없소. 권세를 탐하는 것이 이와 같은 데까지 이르렀으니 그를 위해 선약을 찾아서는 안 될 것이오.”
이에 곧 도망쳐 버렸다. 진시황은 그들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여워하며 말했다.
“내가 전에 천하의 책에서 쓸모없는 것을 거두어 모두 없애 버렸다. 문학과 방술을 하는 선비를 무더기로 부른 것은 태평성대를 일으키고자 함이요,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도사)를 부른 것은 배워 익혀 기이한 약(선약)을 구하게 하려 함이다. 지금 들으니 방사 한중(韓衆)이 떠나서는 보고하지 않고 서불 등은 온갖 방도를 썼는데도 끝내 불사약을 얻지 못하고 한갓 간사한 이익만 챙긴다는 보고가 날마다 들려온다. 내가 노생 등을 존중하여 그들에게 많은 것을 내렸으나 이제는 나를 비방함으로써 나의 부덕함을 더하고 있다. 함양에 있는 유생들에 대해 내가 사람을 시켜 조사해서 물어보도록 하니 어떤 자는 요사스러운 말로써 백성들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에 어사를 보내 유생들을 심문했다. 유생들이 서로를 고발하니 법령으로 금지한 것을 범한 자가 460여 명이었다. 그들 모두를 함양에 생매장하고 천하에 알려 후세에 경고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징발하여 변경으로 유배시켰다. 진시황의 맏아들 부소(扶蘇)가 간언하여 말했다.
“천하가 막 평정되었으나 먼 곳의 백성들은 아직 따르지 않고 있으며, 유생들은 모두 암송하며 공자를 본받고 있는데, 지금 황상께서 법을 엄격하게 하여 그들을 옭아매니, 신은 천하가 안정되지 않을까 봐 두렵습니다. 황상께서 이 점을 살펴 주십시오.”
그러자 진시황은 노여워하며 부소를 북쪽으로 상군에 파견하여 몽염을 감시하게 했다.
02진시황이 죽으면 땅이 나누어지리라
[시황] 36년, 화성이 심수(心宿)를 침범했다.121) 유성(流星)이 동군(東郡)에 떨어졌는데 땅에 닿자 돌덩이가 되었다. 백성들 가운데 누군가 그 돌에 새겨 말했다 .
“진시황이 죽으면 땅이 나누어지리라.”
진시황이 그 말을 듣고는 어사를 파견해 추적하면서 심문했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돌이 있던 곳 주변에 사는 자들을 모두 잡아 죽이고 그 돌을 불살랐다. 진시황은 언짢아한 끝에 박사를 시켜 「선진인시(仙眞人詩)」를 짓게 하고, 천하를 순행하는 곳마다 악사들에게 명하여 연주하고 노래하게 했다. 가을에 사자가 밤중에 관동에서부터 화음(華陰)의 평서(平舒) 길을 지나는데 어떤 사람이 벽옥(璧玉)을 쥐고 있다가 사자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나를 위하여 [함양에 있는] 호지군(滈池君)122)에게 가져다주게.”
그러고는 이어서 말했다.
“금년에 조룡(祖龍)이 죽을 걸세.”
사자가 까닭을 물으려 하자 갑자기 사라졌다. 그 벽옥만 두고 떠나 버린 것이다. 사자가 벽옥을 받들고는 일어났던 일을 모두 진시황에게 보고했다. 진시황이 꽤 오래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
“산(山) 귀신은 본래 1년간의 일을 알 뿐이다.”
또 조정을 물러나면서 말했다.
“조룡이란 사람의 조상이다.”
어부(御府)에 명을 내려 벽옥을 조사하니 바로 28년 순행하다 강수를 건너면서 빠뜨린 벽옥이었다. 이에 진시황이 점을 쳐서 이사하는 것이 길하다는 점괘를 얻었다. 북하(北河)와 유중의 3만 가구를 이주시키고 [집집마다] 작위를 한 등급씩 제수했다.
[시황] 37년, 10월 계축일에 시황제가 순행을 나섰다. 좌승상 이사가 따르고 우승상 풍거질(馮去疾)이 [함양을] 지켰다. 막내아들 호해가 부러워하며 따르기를 청하니 황제가 허락했다. 11월에 순행하다가 운몽(雲夢, 초나라 왕이 사냥을 즐기던 곳)에 이르러 구의산(九疑山)에서 우임금과 순임금에게 제사 지냈다. 강수의 물살을 타고 내려가며 적가(籍柯)를 바라보고 해저(海渚)를 건넜다. 단양(丹陽)을 지나 전당(錢唐)에 도착했다. 절강(浙江)에 이르니 물살이 거세져 서쪽으로 120리를 더 가서 강폭이 좁아지는 곳에서 건넜다. 회계산에 올라 대우(大禹)에게 제사 지내고 남해(南海)를 바라보다 비석을 세워 진나라의 공덕을 노래했다. 그 문장은 이러하다.
황제의 빛나는 공은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여 은덕과 혜택이 오래되었다. [재위] 37년에 몸소 천하를 순행하며 먼 곳까지 두루 유람하셨다. 드디어 회계산에 올라 풍속과 습관을 널리 살펴보시니 백성들이 모두 공경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공덕을 노래하고 치적을 근본으로 삼고 황제의 고명(高明)하심을 되짚었다. 진나라 왕조에 성왕(聖王)이 나라에 임하셔서 처음으로 형벌의 명칭을 정하고 옛 전장 제도를 뚜렷이 펼치셨다. 처음으로 법칙을 공평하게 하고 맡은 직책을 살펴 구분하여 영구불변한 기초를 세우셨다. 여섯 나라의 왕들이 제멋대로 배반하고,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오만하고 사나웠고, 무리를 거느려 스스로 강해지려고 했다. 또 포악하고 방자하여 무력을 등에 지고 교만해서 자주 군대를 동원했다. 또 몰래 첩자를 파견하여 합종(合縱)하고 행동이 치우치고 사악했다. 안으로는 간사한 모략을 꾸미고 밖으로는 변경을 쳐들어와 마침내 재앙을 일으켰다. 정의로운 위엄으로 그들을 정벌하여 흉포하고 어그러진 것을 없애고 안정시키니 난을 일으킨 적들을 멸망시켰다. 성스러운 덕이 넓고 깊어 천하 사람들이 은혜를 입음에 경계가 없게 되었다. 황제께서 천하를 하나로 합치고 모든 일을 두루 들으시니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모두 맑아졌다. 사실을 살펴서 알아보니 각각의 명분이 세워졌다. 법을 어기면 귀천을 막론하고 적용하여 선한 것이든 선하지 않은 것이든 앞서 명백히 드러나니 숨길 일이 없게 되었다. 삼가 스스로 성찰하여 되돌아볼 것을 규정하고 정의를 폈으며, 과거에 자식이 있는데도 다시 시집가면 죽은 남편을 배신하는 것이며 정조가 없는 것이라 여겼다. 내외 관계에 거리를 두어 방지하고 음탕함을 금하자 남녀가 순결하고 진실해졌다. 지아비가 유부녀와 간통을 하면 그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게 하니, 남자는 도덕규범을 지켰다. 아내가 달아나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자식들이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게 하니 모두 정숙하고 맑게 교화되었다. 큰 다스림으로 풍속을 깨끗하게 하니, 천하가 교화를 이어받아 아름다운 덕을 입게 되었다. 법도와 규범을 모두 따르며 화목하고 안정되었고 친절하고 노력하여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백성들이 수양을 하고 순수해져 사람마다 법도를 기꺼이 따르며 태평함을 기뻐하며 보존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법을 공경하며 받들고 훌륭한 다스림이 끝이 없으니 수레와 배가 기울어지지 않듯 나라가 전복되지 않았다. 따르던 신하들이 공적을 노래하며 이 비석에 새겨 광명이 아름다운 비문에 드리우기를 청하노라.
돌아오는 길에 시황제는 오현(吳縣)을 지나 강승현(江乘縣)에서 강을 건너 해안가를 따라 북쪽으로 가서 낭야에 이르렀다. 방사 서불 등이 바다로 들어가 신선의 약을 찾았으나 몇 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하고 비용만 많이 쓰자, 책망이 두려워 거짓으로 말했다.
“봉래의 약을 구할 수는 있으나 항상 커다란 상어 때문에 고충을 당했기에 도달할 수 없사오니, 청하건대 활 잘 쏘는 사람과 함께 가서 상어가 나타나면 연노(連弩, 여러 발을 연달아 발사할 수 있는 활)로 쏘도록 해 주십시오.”
진시황이 꿈에 해신과 싸웠는데 마치 사람의 형상과 같았다. 꿈을 풀이하는 이에게 물으니, 박사가 말했다.
“물의 신은 보이지 않으므로 큰 물고기나 교룡(蛟龍)으로 그 징후를 찾습니다. 지금 황상께서 공경함을 지니고 제사를 지내셨으나 이러한 사악한 귀신이 나타났으니 마땅히 없애야만 선한 신이 올 수 있사옵니다.”
그러고는 바다에 들어가는 자에게 거대한 물고기를 잡는 기구를 가지고 가도록 명하고 스스로는 연노를 가지고 큰 물고기를 기다렸다가 쏘려고 했다. 낭야에서부터 북쪽으로 영성산(榮成山)에 이르렀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지부산에 이르러 거대한 물고기가 나타나자 화살을 쏘아 죽였다. 마침내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갔다.
평원진(平原津)에 도착했는데 병이 났다. 시황제가 죽는다고 말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은 감히 죽음에 대한 일을 말하지 못했다. 황제의 병이 더욱 깊어지자 옥새를 찍은 조서를 써서 공자 부소에게 보내 일렀다.
장례에 참석하고 함양에 안장하라.
그러고는 편지를 밀봉하여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의 관부에 놓아 둔 채 사자에게 주지 않았다.
7월 병인일에 시황제가 사구(沙丘)의 평대(平臺)에서 세상을 떠났다. 승상 이사는 황제가 외지에서 죽었기 때문에 여러 공자와 천하에 변란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다. 관을 온량거(轀涼車, 밀폐되면서도 통풍이 잘되며 누울 수 있는 수레인데 여기서는 영구차의 의미) 속에 안치하고 예전에 총애를 받던 환관이 참승(參乘)123)이 되어 도착하는 곳마다 황제에게 음식을 올렸으며, 모든 신하가 전과 다름없이 나랏일을 아뢰었다. 환관이 온량거 안에 있다가 보고된 일을 결재했다. 공자 호해와 조고 및 총애를 받던 환관 대여섯 명만이 황제가 죽은 것을 알았다. 조고가 예전에 호해에게 서법 및 형법과 법령을 가르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호해는 그를 개인적으로 총애했다. 조고는 곧 공자 호해, 승상 이사 등과 은밀히 모의하여 진시황이 공자 부소에게 내린 밀봉 서찰을 뜯어 승상 이사가 사구에서 유조(遺詔)를 받았다고 거짓으로 바꾼 후, 공자 호해를 태자로 삼았다. 그러고는 다시 서찰을 만들어 공자 부소와 몽염에게 주고 그들의 죄를 낱낱이 지적하면서 자살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일은 전부 「이사 열전」에 기재되어 있다.
순행하다가 드디어 정형(井陘)에서부터 구원(九原)에 도착하게 되었다. 때마침 여름이라 황제의 온량거에서 악취가 나자, 즉시 수행하던 관원에게 소금에 절여 말린 고기 한 석(石)을 싣도록 명하여 [시체에서 나는] 악취와 구분하지 못하게 했다.
순행하여 직도(直道, 직선 도로)124)를 따라 함양에 도착한 후 초상을 알렸다. 태자 호해가 제위를 이어 이세황제(二世皇帝)가 되었다. 9월에 진시황을 여산에 안장했다. 진시황은 막 제위에 올라 여산을 뚫어 다스렸고 천하를 통일하여 전국에 70여만 명을 보내 이주시켜 땅을 깊이 파게 하고 구리물을 부어 틈새를 메워 외관을 설치했으며, 궁관, 모든 관원, 기이한 기물, 진귀하고 특이한 물건들을 만들어 운반해서 가득 보관하게 했다. 기술자에게 자동으로 발사되는 활과 화살을 만들도록 명하여 그곳에 접근하여 파내려는 자가 있으면 즉시 발사되게 했다. 수은으로 온갖 내, 큰 강, 넓은 바다를 만들어, 기계에 수은을 집어넣어 흐르게 했다. 위로는 천문(天文, 하늘의 형상)을 갖추고 아래로는 지리(地理, 땅의 형상)를 갖추었다. 사람 모양의 물고기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미리 계획했다. 이세황제가 말했다.
“선왕의 후궁들을 자식이 없는 자라 하여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모두 따라서 죽으라고 명하니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매장이 끝나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기술자들은 기계와 숨겨진 보물을 모두 알고 있으니 숨겨진 보물들은 바로 누설될 것이다.”
상례가 끝나고 보물들도 이미 매장되자 묘로 통하는 길의 가운데 문을 폐쇄하고, 묘로 통하는 길의 바깥문을 내려 기술자와 노예들이 나오지 못하게 다 가둬 다시는 나오는 자가 없었다. 풀과 나무를 심어 묘지가 산과 비슷하게 했다.
03하늘이시여, 나는 죄가 없습니다
이세황제 원년, 황제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조고를 낭중령(郎中令)으로 삼아 나랏일을 좌지우지하게 했다. 이세황제가 조서를 내려 시황제의 침묘(寢廟)에 바치는 희생 및 산천에 드리는 온갖 제사의 예물을 늘렸다. 여러 신하들에게 시황제의 묘를 받드는 문제를 상의하게 했다. 신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옛날에 천자는 칠묘(七廟), 제후는 오묘(五廟), 대부는 삼묘(三廟)를 두어, 만년이 지나더라도 허물어 없애지 않았습니다. 지금 시황제의 묘는 가장 숭고한 묘로서 전국에서 모두 공물을 바치고 희생을 늘리고 예를 다 갖추어 더 할 것이 없습니다. 선왕들의 묘는 어떤 것은 서쪽 옹야(雍野)에 있고, 어떤 것은 함양에 있습니다. 천자께서는 예법에 따라 마땅히 시황제의 묘에만 잔을 받들어 올려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양공(襄公, 진나라를 세운 군주) 이하의 묘는 모두 헐어 없애야 합니다. 설치되어 있는 것은 모두 일곱 묘125)입니다. 여러 신하들에게 예로써 제사를 드리게 하고 시황제의 묘를 높여 황제의 시조묘(始祖廟)로 삼으십시오. 황제께서는 다시 스스로 ‘짐(朕)’이라 부르십시오.”
이세황제가 조고와 의논하여 말했다.
“짐이 나이가 어린 데다 이제 막 자리에 올라 백성들이 아직 복종하지 않소. 돌아가신 황제께서는 군현을 순행하심으로써 국력의 강대함을 과시하고 위엄으로 천하를 복종시켰소. 그런데 짐이 편안히 지내면서 순행하지 않는다면 나약하게 보여 천하를 다스릴 방도가 없게 될 것이오.”
봄에 이세황제가 동쪽으로 군현을 순행하니 이사가 수행했다. 갈석산에 이른 뒤 바다를 따라 남쪽 회계산에 도착하여, 시황제가 세워 글씨를 새긴 비석의 측면에 수행한 모든 신하들의 이름을 새기고 선왕이 이룬 공적과 성대한 덕을 밝혔다. 이세황제가 말했다.
“금석에 새긴 것은 모두 시황제께서 행하신 것이오. 이제 호칭을 이어받고 나서도 금석에 새긴 글귀에 ‘시황제’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세월이 오래 흐르고 멀어지고 나서는 후대에 계승한 자가 행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시황제가 이룬 공적과 성스러운 덕에 걸맞지 않을 것이오.”
승상 신하 이사, 신하 풍거질, 어사대부 신하 덕(德)이 목숨을 걸고 진언했다.
“청컨대 신들이 지금 황제께서 내리신 조서를 이 비석에 다 새겨 이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습니다. 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옵니다.”
황제가 명을 내려 말했다.
“허락하노라.”
그러고는 이세황제가 요동으로 순행을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이세는 조고의 의견을 들어 법령을 공표했다. 그러고는 은밀히 조고와 의논하여 말했다.
“대신들은 나를 따르지 않고 관리들은 아직도 세력이 강력하며, 여러 공자(황자)들은 기필코 나와 제위를 다투려 하니 어찌해야 하오?”
조고가 말했다.
“신이 진실로 말씀드리길 원했으나 감히 그러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신 황제의 대신들은 모두 천하에 여러 대에 걸쳐 명망을 떨친 귀인(貴人)들로서 공적을 쌓고 대대로 수고함으로써 서로 전해서 내려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본래 보잘것없고 비천한데도 다행히 폐하께서 등용해 주셔서 지금의 높은 자리에 두신 덕분에 궁중의 일을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겉으로는 신을 따르지만 마음속으로는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순행을 나오신 때를 틈타 군현의 수(守)나 위(尉) 중에서 죄 지은 자들을 심문해 죽인다면 위로는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 아래로는 평소에 못마땅하게 여기던 자들을 없앨 수 있습니다. 지금은 문(文)을 사표로 삼아야 할 때가 아니라 무력으로 판결을 내려야 하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시세에 따름을 의심하지 마시고, 여러 신하들이 모의할 틈조차 주지 마십시오. 현명한 군주가 남아 있는 백성(유민)을 거두어 등용함으로써 비천한 자는 귀하게 하고 빈곤한 자는 부유하게 하며 멀리 있는 자는 가까이 오게 하면 위아래가 한뜻으로 모여 나라가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이세황제가 말했다.
“옳다.”
즉시 대신들과 여러 공자들을 죽이고, 죄와 허물로 연루시켜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와 삼랑(三郎, 중랑(中郎), 외랑(外郎), 산랑(散郎))을 체포하니, 자리에 있는 자가 없었고 여섯 공자들도 두현(杜縣)에서 도륙됐다. 공자 장려(將閭)의 형제 세 사람은 내궁(內宮)에 갇혔는데, 그 죄를 논하느라 처형이 늦어졌다. 이세황제가 사자를 보내 장려에게 명했다.
“공자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으므로 죄는 사형이 마땅하니 형리가 형을 집행하리라.”
그러자 장려가 말했다.
“궁중 예법으로 나는 일찍이 감히 빈찬(賓贊, 예의나 의식을 관장하는 관원)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조정 자리에서도 나는 일찍이 감히 예절을 어긴 적이 없었다. 또 명을 받들어 답할 때도 나는 일찍이 감히 실언을 한 적이 없었다. 어찌하여 신하 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고 하는가? 죄명을 듣고 나서 죽기를 원한다.”
사자가 말했다.
“신은 죄를 논의하는 데 함께할 수 없으며, 조서를 받들어 일을 처리할 뿐입니다.”
장려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하늘을 세 번이나 부르짖고 말했다.
“하늘이시여! 나는 죄가 없습니다.”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칼을 뽑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종실들은 두려워 떨었다. 신하들이 간언하는 것은 비방이라 여기자 고관들은 녹봉을 유지하기 위해 구차스럽게 아첨하려고만 했고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다.
4월에 이세황제가 함양에 돌아와서 말했다.
“선제께서는 궁전이 작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아방궁을 지어 궁전으로 삼으셨소. 미처 다 짓지 못했는데 때마침 돌아가시자, 짓는 것을 그만두고 여산에서 판 흙을 다시 여산의 묘지에 덮어야만 했소. 여산의 일이 완전히 끝났는데 지금 아방궁을 버려두고 완공하지 않는다면, 이는 선제께서 거행한 일이 잘못이었음을 밝히는 것이오.”
이에 아방궁을 다시 지었다.
밖으로는 사방의 융족을 진무했는데, 시황제의 정책과 다르지 않았다. 힘센 병사 5만 명을 징발한 후 함양에 주둔하여 지키게 했으며, 그들에게 활쏘기를 연마하고 개, 말, 날짐승과 길짐승을 조련하게 했다. 먹어야 할 사람이 많아 곡식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각 군현에 곡식과 사료를 조달하라고 명하고 이를 운반하는 사람은 모두 스스로 식량을 휴대하게 하여, 함양 300리 안에서는 이 곡식을 먹을 수 없게 했다. 법을 운용하는 것이 더욱 각박하고 심해졌다.
7월에 수자리 병사 진승(陳勝, 진섭(陳涉))126) 등이 옛 형(荊) 땅에서 모반을 일으켜 ‘장초(張楚, 초나라를 넓힌다는 뜻)’라 했다. 진승은 스스로 자리에 올라 초왕(楚王)이 되었으며, 진현에 머물면서 여러 장수들을 보내 땅을 점령하게 했다. 산동 군현의 젊은이들은 진나라 관리에게 고충을 겪자 각자 자기 지방의 군수(郡守), 군위(郡尉), 현령(縣令), 현승(縣丞)을 죽이고 모반을 일으켜 진섭(陳涉)에게 호응했다. 그들은 서로 자리에 올라 제후나 왕이 된 후, 진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연합하여 서쪽으로 향했는데, 그 수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동쪽으로 보낸 알자(謁者, 황제의 사령을 전달하는 관리)가 와서 모반이 일어났음을 이세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이세황제가 노여워하여 그를 옥리에게 보내고는 죄를 다스리게 했다. 그 뒤 다른 사자가 도착하자 이세황제가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사자가 대답했다.
“도적 떼는 각 군의 수(守)나 위(尉)가 한참을 추격하여 다 잡아들여서 지금은 걱정할 것이 못 됩니다.”
이세황제가 기뻐했다. 무신(武臣, 진섭의 부장(部將))은 스스로 자리에 올라 조(趙)나라 왕이 되었고, 위구(魏咎)는 위(魏)나라 왕이 되었으며, 전담(田儋)은 제(齊)나라 왕이 되었다. 패공(沛公, 유방(劉邦))이 패현(沛縣)에서 일어났고 항량(項梁)이 회계군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이세황제] 2년, 겨울에 진섭이 보낸 주장(周章) 등의 무리가 서쪽으로 나아가 희정(戱亭)에 이르니 병사의 숫자가 10만이었다. 이세황제가 크게 놀라 여러 신하들과 상의하여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하오?”
소부(少府) 장한(章邯)이 말했다.
“도적이 벌써 도착했으며 병력이 강성하니, 지금 가까운 고을에서 군대를 징발해도 때가 늦습니다. 여산에 죄수들이 많으니 그들을 사면하시고 무기를 주어 도적을 무찌르십시오.”
이세황제가 즉시 천하에 대사면을 내린 후, 장한으로 하여금 그들을 거느리고 주장의 군대를 격파하러 보냈다. [장한이] 조양(曹陽)에서 주장을 죽였다. 이세황제는 장사(長史)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를 더 파견해 장한을 도와 도적을 무찌르게 하여 진승을 성보(城父)에서 죽이고, 항량을 정도(定陶)에서 무찔렀으며 위구를 임제(臨濟)에서 죽였다. 초나라 땅의 도적이었던 이름난 장수들을 죽이고 나서 장한은 곧바로 북쪽으로 하수를 건너 거록(鉅鹿)에서 조왕(趙王) 헐(歇)의 무리를 공격했다.
조고가 이세를 설득하여 말했다.
“선제께서는 천하에 군림하여 제압한 지 오래되셨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감히 그릇된 짓을 하거나 사악한 말을 진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나이가 한창 젊으신 데다 이제 막 즉위하셨는데 어째서 공경들과 함께 나랏일을 정하십니까? 일이 잘못된다면 이는 신하들에게 약점을 보이는 것입니다. 천자가 ‘짐’이라고 부르는 것은 진실로 [군신들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뜻입니다.”
이에 이세는 늘 깊은 궁중에 머물며, 조고와 함께 모든 일을 결정했다. 그 후로 공경들이 천자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어졌으며, 도적들은 더욱 많아져 관중의 병사들이 징발되어 동쪽으로 가서 도적들을 공격하는 일이 그치질 않았다. 우승상 풍거질, 좌승상 이사, 장군 풍겁(馮劫)이 간언하여 말했다.
“관동 지방에서 도적 떼가 일어나자 진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니 죽거나 도망치는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도적들이 많아지는 것은 전부 수자리 살거나 수송하는 일이 고달프고 세금도 많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아방궁 짓는 것을 잠시 멈추시고 변방의 요역과 운송을 줄여 주십시오.”
이세황제가 말했다.
“짐이 듣건대 한비자는 ‘요순은 나무를 베어다 깎아 내지 않고 서까래를 만들고 띠로 지붕을 일 때도 처마 끝을 잘라 내지 않았으며, 질그릇에 밥을 먹고 토기에 물을 담아 마셨으니, 비록 문지기의 먹을 것이라 해도 이보다 누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임금은 용문(龍門)을 뚫어 대하(大夏)로 통하게 하여 하수의 막힌 물길을 터서 바다로 흐르게 할 때 직접 자신이 가래를 쥐고 흙을 다듬어 정강이에 털이 없어졌으니 노예의 수고로움도 이보다 대단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한다. 무릇 천하를 얻어 귀하게 된 자는 뜻대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으며, 군주가 엄중히 법을 밝히면 아랫사람들이 감히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아서 천하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은나라와 하나라의 군주는 고귀하여 천자가 되었는데도, 몸소 곤궁하고 수고롭고 고단한 현실에 처해서 백성들을 위해 희생했으니, 오히려 무엇을 본받겠는가? 짐은 지극히 존귀한 만승(萬乘)의 천자이나 그 실질적인 것이 없으니 천승(千乘)의 어가와 만승의 군속을 만들어 내 이름과 칭호를 충족하려 하는 것이다. 또한 선제께서는 제후 출신으로 일어나 천하를 겸병하고, 천하가 안정되자 밖으로 사방 융족을 물리쳐서 변방을 안정시켰으며, 궁실을 지어 뜻을 얻었음을 밝히셨으니, 그대들도 선제가 남기신 업적들을 보았을 것이니라. 지금 짐이 즉위하고 두 해 사이에 도적 떼가 일어났는데도 그대들은 막지 못했고, 이제 와서는 선제께서 손대신 사업을 버리려 하니 이것은 위로는 선제께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짐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자리에 있는 것이냐?”
이에 옥리에게 명하여 풍거질, 이사, 풍겁의 죄를 심문하게 했다.
풍거질과 풍겁이 말했다.
“장상(將相)은 모욕을 당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사는 마침내 옥에 갇혔다가 오형을 받았다.
진시황 본기 2부 끝 ·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