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 本紀

진시황 본기秦始皇本紀

제6편 · 1부

여불위의 첩에게서 난 출생부터 천하통일·황제 칭호·순행 각석까지

01첩의 아들 진시황

진시황제는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이다. 장양왕이 조나라에서 진나라의 볼모가 되어 있을 때 여불위의 첩을 보고는 기뻐하며 그녀를 얻어 시황(始皇)을 낳았다.99)

진나라 소왕(昭王) 48년, 정월에 한단에서 태어났다. 낳았을 때 이름은 정(政)이고 성은 조(趙)였다. 열세 살 때, 장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정이 대신 자리에 올라 진나라 왕이 되었다. 당시 진나라 영토는 이미 파, 촉, 한중을 손아귀에 넣었고, [초나라의] 완(宛)을 넘어 영을 차지하여 남군을 두었다. 북쪽으로는 상군의 동쪽을 거두어들여 하동, 태원, 상당 등의 군을 차지했다. 동쪽으로는 형양에까지 이르렀으며 이주(二周, 동주와 서주)를 멸망시키고 삼천군(三川郡)을 두었다. 여불위는 재상이 되어 10만 호에 봉해지고, 문신후(文信侯)라 불렸다. 빈객과 유사(游士, 천하를 떠돌아 다니는 지식인으로서 식객이라고도 함)를 불러 모아 천하를 한데 아우르려고 했다. 이사가 사인(舍人)100)이 되고, 몽오(蒙鷔), 왕기(王齮), 표공(麃公) 등이 장군이 되었다. 왕은 나이가 어린 데다 막 자리에 오른 터라 나랏일을 대신들에게 맡겼다.

[시황] 원년, 진양(晉陽)이 모반하자 장군 몽오가 공격하여 평정했다.

[시황] 2년, 표공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권(卷, 위나라의 도읍)을 공격하여 수급 3만을 베었다.

[시황] 3년, 몽오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성 열세 개를 빼앗았다. 왕기가 죽었다. 10월에 장군 몽오가 위나라의 창(畼)과 유궤(有詭)를 공격했다. 이해 큰 기근이 들었다.

[시황] 4년, 창과 유궤를 빼앗았다. 3월에 군대를 철수했다. 볼모였던 진나라의 태자가 조나라로부터 돌아왔고, 조나라의 태자도 [진나라를]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다. 10월 경인일에 황충이 동쪽으로부터 와서 하늘을 뒤덮었다. 천하에 역병이 돌았다. 백성이 곡식 1000석을 바치면 작위 1등급을 수여했다.

[시황] 5년, 장군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산조(酸棗), 연(燕), 허(虛), 장평(長平), 옹구(雍丘), 산양(山陽) 등의 성을 평정하려 했으며, 끝내 그것들을 모두 함락하고 성 스물을 빼앗았다. 처음으로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겨울에 천둥이 쳤다.

[시황] 6년,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 위(衛)나라, 초나라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여 수릉(壽陵)을 빼앗았다. 진나라가 군대를 내보내자 다섯 나라 군대들이 물러났다. 위(衛)나라를 점령하고 동군을 압박하자 위나라 군주 각(角)이 그 수하들을 거느리고 야왕(野王)으로 옮겨 거하면서, 산세에 기대 위나라의 하내 땅을 지켰다.

[시황] 7년, 혜성이 먼저 동쪽에서 나타났다가 북쪽에 나타났고, 5월에는 서쪽에 나타났다. 장군 몽오가 죽었다. 이 때문에 용(龍), 고(孤), 경도(慶都)를 공격하다가 군대를 되돌려 급(汲)을 공격했다. 혜성이 다시 서쪽에서 열엿새 동안 나타났다. 하 태후(夏太后, 장양왕의 생모)가 세상을 떠났다.

[시황] 8년, 진나라 왕의 동생 장안군(長安君) 성교(成蟜)가 군대를 거느리고 조나라를 공격하다가 모반했으나 둔류(屯留)에서 죽었고, 그 군관들도 모두 목을 베어 죽였으며, 그 백성들은 임조(臨洮)로 옮겨 살게 했다. 장군 벽(壁)이 죽자 둔류(屯留)의 병졸이었던 포고(蒲鶮)가 모반하여 그 시신을 갈기갈기 찢었다. 하수의 물고기가 대거 올라오니, [사람들은] 빈 마차와 살찐 말을 몰고 먹을 것을 구하러 동쪽으로 갔다.

노애(嫪毐)101)를 장신후(長信侯)로 봉했다. 그에게 산양 땅을 주고 그곳에 살게 했다. 궁실, 수레와 말, 의복, 동산, 말 달려 하는 사냥을 그 마음대로 했다. 일이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모두 노애가 결정했다. 또 태원군을 더해 노애의 봉국으로 삼았다.

02진왕이 천하에서 뜻을 얻는다면 천하는 노예가 될 것이다

[시황] 9년, 혜성이 나타나 때때로 하늘 끝까지 뻗쳤다. 위나라의 원과 포양(蒲陽)을 공격했다. 4월, 진나라 왕이 옹(雍)에서 유숙했다. 기유일, 진나라 왕은 관례(冠禮)를 치르고 검을 찼다. 장신후 노애가 난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었다. 이에 왕의 옥새 및 태후의 인장을 위조하고, 현의 군사 및 호위병, 관아의 기병, 융적(戎翟)의 우두머리, 가신(家臣, 궁중에서 기거하는 신하들)을 부추겨 기년궁(蘄年宮)을 공격함으로써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 진나라 왕이 이를 알고는 상국인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으로 하여금 군대를 일으켜 노애를 공격하게 했다. [두 군대가] 함양에서 싸웠다. 수급 수백을 베었는데, [그에 공 있는 자들] 모두에게 작위를 내렸으며, 전쟁을 치르는 환관들도 모두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 노애 등이 싸움에 져 달아나니, 즉시 나라 안에 영을 내려 노애를 산 채로 잡아 오는 자에게는 100만 전을, 그를 죽이는 자에게는 50만 전을 내린다고 했다. 노애의 일당이 모두 잡혔다. 위위(衛尉)(竭), 내사 사(肆), 좌익(佐弋)(竭), 중대부령(中大夫令)(齊) 등 스무 명이 모두 나무 위에 머리가 매달리고, 사지는 수레에 찢겨 백성들에게 보였으며, 그 종족들은 멸족되었다. 그들의 가신이나 죄가 가벼운 자에게는 귀신형(鬼薪刑, 종묘에 필요한 땔나무를 3년간 해 오는 형벌)을 내렸다. 4000여 가구가 작위를 박탈당하고 촉 땅으로 옮겨져 방릉(房陵)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달은 춥고 얼음이 얼어 그로 인해 죽은 자가 있었다. 양단화(楊端和)가 연지(衍氏, 위(魏)나라 고을로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 북쪽에 있음)를 공격했다.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다가 또 북쪽에 나타났는데 북두성(北斗星)을 따라서 남쪽으로 80일간 나타났다.

[시황] 10년, 상국 여불위가 노애의 일에 연루되어 자리에서 물러났다. 환의(桓齮)가 장군이 되었다. 제나라와 조나라가 조회하러 오자 주연을 베풀었다. 제나라 사람 모초(茅焦)가 진나라 왕을 설득해 말했다.

“진나라가 바야흐로 천하 통일을 대업으로 삼고자 하나, 대왕께서 모태후(母太后, 진시황의 생모)를 [옹에] 유배하셨으니, 제후들이 소문을 듣고 그 일을 빌미로 진나라를 배반할까 두렵습니다.”

진왕이 곧 옹에서 태후를 함양으로 맞아들였다가 다시 감천궁(甘泉宮)에 살게 했다.

[진왕이] 대규모로 빈객들을 찾아내 쫓아내려 했다. 이사가 글을 올려 설득하니 빈객을 쫓아 버리라는 명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이사가 진나라 왕을 설득하여 먼저 한나라를 공격해 빼앗아 다른 나라에 겁을 주자고 청하자, 이사를 보내 한나라를 함락하게 했다. 한나라 왕이 걱정한 끝에 한비(韓非)102)와 함께 진나라를 약화시킬 것을 꾀했다. 대량 사람 위료(尉繚)가 와서 진나라 왕을 설득하여 말했다.

“진나라가 강대해지자, 제후들은 마치 군현의 우두머리와 같아졌습니다. 신은 다만 제후들이 합종하여 [군대를] 모아 뜻하지 않게 출병할까 두려우니, 이는 바로 지백, 부차, [제나라] 민왕(湣王)103)이 망하게 된 까닭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재물을 아끼지 마시고 권세 있는 대신들에게 주어서 그들의 모략을 혼란스럽게 하신다면, 불과 30만 금만 쓰고서도 제후들의 그러한 마음을 완전히 없앨 수 있습니다.”

진왕이 그의 계략을 따르면서, 위료를 만날 때는 대등하게 예우하여 옷과 음식도 그와 같게 했다. 그러자 위료가 말했다.

“진왕은 사람됨이 오뚝한 코, 가늘고 긴 눈, 사나운 새 같은 가슴, 승냥이 같은 음성에 은사를 베푸는 것은 적은 데다 호랑이나 이리 같은 마음을 품고 있어 곤궁에 처하면 쉽게 다른 사람 아래에 들어가고, 뜻을 얻으면 역시 쉽게 남을 잡아먹을 것이다. 나는 평민 신분인데도 그는 나를 만날 때 항상 스스로 몸을 낮춘다. 진실로 진왕이 천하에서 뜻을 얻는다면 천하는 모두 그 노예가 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오래 교유할 수는 없다.”

그러고는 도망쳐 떠나려 했다. 진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한사코 머무르도록 한 후 진나라의 국위(國尉, 군사 일을 통괄하는 자리로 태위에 비견됨)로 삼아 결국 그의 계책을 썼다. 그리고 이사가 좌지우지하였다.

[시황] 11년, 왕전(王翦),104) 환의, 양단화가 업(鄴)을 공격해 아홉 성을 빼앗았다. 왕전이 [조나라의] 연여와 요양(橑楊)을 공격해 그들을 모두 모아 하나의 군대로 만들었다. 왕전이 열여드레 동안 군대를 거느렸는데 군사 중에서 녹봉이 두식(斗食) 이하(연간 곡식 100섬 이하를 받는 미관말직을 가리킴)면 돌려보내고, 열 명 가운데 두 명을 뽑아 군대에 남게 했다. 업과 안양을 빼앗고 환의가 그 군대를 거느렸다.

[시황] 12년, 문신후 여불위가 죽자 몰래 장례를 치렀다. 신하 가운데 장례식에 간 사람 중 진(晉)나라 사람인 경우에는 내쫓았고, 진나라 사람인 경우 녹봉이 600섬 이상인 자는 관직을 빼앗고 다른 곳에 옮겨 살게 했다. [녹봉이] 500섬 이하로 장례식에 가지 않은 사람은 옮겨 살게 하고 관직은 빼앗지 않았다. 이때부터 노애나 여불위처럼 나랏일을 하면서 도를 지키지 않는 자는 그 집안을 노예 명부에 기록하고 모두 노예로 삼겠다고 하며 그대로 보여 주었다. 가을에 노애의 가신 가운데 촉 땅으로 옮겨 살게 했던 사람의 죄를 사면해 주었다. 이때 천하에 큰 가뭄이 들다가, 6월부터 8월에는 비가 내렸다.

[시황] 13년, 환의가 조나라의 평양을 공격하여 조나라 장군 호첩(扈輒)을 죽이고 수급 10만을 베었다. 진나라 왕이 하남에 갔다. 정월에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10월에 환의가 조나라를 공격했다.

[시황] 14년, 평양에서 조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의안(宜安)을 빼앗고, [조나라 군대를] 격파했으며 그 장군을 죽였다. 환의가 평양과 무성을 평정했다. 한비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자, 진나라가 이사의 계략을 좇아 한비를 억류하니 한비가 운양(雲陽)에서 죽었다. 한나라 왕이 신하가 되기를 청했다.

[시황] 15년, [진나라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한 군대는 업에 이르고 다른 한 군대는 태원에 이르러 낭맹을 빼앗았다. 지진이 있었다.

[시황] 16년, 9월에 군대를 출동시켜 한나라 남양 땅을 얻고 등(騰)을 군수로 대신하게 했다. 영을 내려 처음으로 남자의 나이를 [호적에] 기록하게 했다. 위나라에서 땅을 진나라에 바쳤다. 진나라가 여읍(麗邑)을 두었다.

[시황] 17년, 내사 등(騰)이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 왕 안(安)을 사로잡고, 그의 땅을 전부 빼앗아 그 땅을 군(郡)으로 만들어 명을 내려 영천(潁川)이라고 부르게 했다. 지진이 있었다. 화양 태후(華陽太后)가 죽었다. 백성들이 큰 굶주림을 겪었다.

[시황] 18년, 군대를 크게 일으켜 조나라를 공격했다. 왕전이 상지(上地)의 군대를 거느리고 정형(井陘)을 함락시켰다. 양단화는 하내의 군대를 거느리고, 강외(羌瘣)와 함께 조나라를 정벌했다. 양단화가 한단성을 포위했다.

[시황] 19년, 왕전과 강외가 조나라 땅 동양(東陽)을 모조리 평정해 빼앗고 조나라 왕을 사로잡았다.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려고 중산에 진을 쳤다. 진나라 왕은 한단에 가서 일찍이 자신이 조나라에서 태어났을 때 외갓집과 원한 맺은 사람들을 모두 산 채로 묻었다. 진왕은 돌아오면서 태원과 상군을 거쳐서 왔다. 진왕의 모친 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조나라 공자 가(嘉, 조나라의 마지막 군주)가 종족 수백 명을 이끌고 대(代)나라로 가서 스스로 자리에 올라 대나라 왕이 된 후, 동쪽으로 연나라와 군대를 합쳐 상곡(上谷)에 주둔했다. 큰 기근이 있었다.

[시황] 20년, 연나라 태자 단(丹)은 진나라 군사들이 연나라로 쳐들어올 것을 근심한 끝에 형가(荊軻)를 시켜 진나라 왕을 찔러 죽이려 했다. 진나라 왕이 그것을 알아채고 형가의 사지를 절단하여 [사람들에게] 보인 후, 왕전과 신승(辛勝)에게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연나라와 대나라가 군대를 출동시켜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으나 진나라 군대가 연나라를 역수(易水) 서쪽에서 쳐부쉈다.

[시황] 21년, 왕분(王賁)이 형(荊)나라(초나라)를 공격했다. 뒤이어 군대를 더 많이 징발하여 왕전의 군대로 가게 해 마침내 연나라 태자의 군대를 쳐부수고 연나라의 계성(薊城)을 빼앗았으며, 태자 단의 머리를 얻었다. 연나라 왕이 동쪽으로 가서 요동(遼東)을 거두어들인 후 그곳에서 왕 노릇을 했다. 왕전이 병들고 늙어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했다. 신정(新鄭)에서 모반이 일어났다. 창평군을 [초나라의] 영으로 옮겨 살게 했다. 눈이 많이 내려 두 자 다섯 치나 쌓였다.

[시황] 22년, 왕분이 위나라를 공격하면서 하구(河溝)를 끌어다 대량에 물을 대니 대량성이 무너졌다. 위나라 왕이 항복을 요청하자 그의 땅을 모두 빼앗았다.

[시황] 23년, 진왕이 왕전을 다시 불러 그를 억지로 [장군으로] 임명한 후 병사들을 이끌고 형나라를 치게 했다. 진(陳)의 남쪽부터 평여(平輿)에 이르는 땅을 얻고 형나라 왕(초나라 왕)을 사로잡았다. 진나라 왕이 순행하여 영도(郢都)와 진현(陳縣)에 이르렀다. 형나라의 장수 항연(項燕)이 창평군을 임금으로 세워 형나라 왕으로 삼고, 회수 남쪽에서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시황] 24년, 왕전과 몽무(蒙武)가 형나라를 공격하여 형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창평군이 죽자 항연이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황] 25년, 군대를 크게 일으켜 왕분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연나라 요동을 공격하게 하여 연나라 왕 희(喜)를 사로잡았다. 돌아오는 도중에 대나라를 공격하여 대나라 왕 가를 사로잡았다. 왕전이 형나라의 강남 땅을 평정하여 월나라 군주를 항복시키고 회계군을 두었다. 5월에 천하에 큰 잔치를 열었다.

[시황] 26년, 제나라 왕 건(建)이 상국 후승(后勝)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서쪽 변경을 지키며 진나라와 왕래하지 않았다. 진나라는 장군 왕분으로 하여금 연나라로부터 남쪽으로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제나라 왕 건을 사로잡았다.

03짐을 시황제라 부르겠노라

진나라가 막 천하를 손아귀에 넣자 승상과 어사(御史)에게 명을 내려 말했다.

“예전에 한나라 왕은 땅을 바치고 옥새를 내주면서 번신(藩臣)이 되기를 청했다가 얼마 안 되어 약속을 어기고 조나라, 위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를 배반했으므로 [진나라는]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주살하고 한나라 왕을 사로잡았다. 과인은 이렇게 하기를 잘했다 여기며 전쟁이 끝나기를 기대했다. 조나라 왕은 상국 이목(李牧)을 사신으로 보내 맹약을 맺었으므로 볼모로 있던 그 아들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맹약을 배반하고 태원에서 나에게 모반했으므로 군대를 일으켜 주살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조나라 공자 가가 스스로 자리에 올라 대나라 왕이 되었으므로,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공격해 멸했다. 위나라 왕은 처음에는 진나라에 복종하기로 약속했으나 얼마 안 되어 한나라, 조나라와 함께 진을 습격할 것을 도모했다. 이에 진나라 군사들은 주살하고 마침내 그들을 쳐부쉈다. 형나라 왕이 청양(靑陽) 서쪽 땅을 바쳤으나 얼마 안 되어 약속을 어기고 우리 땅 남군을 공격했기 때문에 군대를 보내어 주살하고 그 왕을 사로잡아 마침내 형나라 땅을 평정했다. 연나라 왕이 어리석고 문란하여 그 태자 단이 몰래 형가를 시켜 나를 죽이게 했으므로 군대를 보내 [단을] 주살하고 연나라를 멸했다. 제나라 왕이 후승의 계책을 써서 진나라와 사신 왕래를 끊어 버리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므로 [진나라] 군대가 주살하고 그 왕을 포로로 잡아 제나라 땅을 평정했다. 과인은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군대를 일으켜 포학한 반도들을 주살할 수 있었던 것은 조상의 혼령이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여섯 나라 왕이 모두 자신들의 죄를 승복하니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 이제 [나의] 호칭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룬 공적에 걸맞지 않게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그대들은 제왕의 칭호를 논의하라.”

승상 왕관(王綰), 어사대부(御史大夫) 풍겁(馮劫), 정위(廷尉) 이사 등이 모두 말했다.

“옛날에 오제는 땅이 사방 1000리였고, 그 바깥의 후복이나 이복(夷服)의 제후들 가운데 어떤 자는 조회에 들기도 하고 어떤 자는 들지 않았으나, 천자가 그들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의로운 군대를 일으키시어 남아 있는 적들을 주살하고 천하를 평정하여 전국에 군현을 만들고 법령을 통일하셨으니, 아주 오랜 옛날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로 오제라 할지라도 감히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박사(博士)들과 함께 논의하여 말하기를 ‘고대에는 천황(天皇)이 있고, 지황(地皇)이 있고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태황이 가장 존귀했다.’라고 했습니다. 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존칭을 올리나니, 왕을 ‘태황(泰皇)’이라 하십시오. 명(命)을 ‘제(制)’라 하시고, 영(令)을 ‘조(詔)’라 하시며, 천자가 스스로를 부를 때는 ‘짐(朕)’이라 하십시오.”

진왕이 말했다.

“‘태(泰)’ 자를 없애고 ‘황(皇)’ 자를 남겨둔 후 상고 시대의 ‘제(帝)’라는 호칭을 받아들여 ‘황제(皇帝)’라고 부를 것이다. 다른 것은 의논한 바대로 하라.”

그러고는 명을 내렸다.

“허락하노라.”

장양왕을 추존하여 태상황(太上皇)이라 하고는 제칙을 내려 말했다.

“짐이 듣건대 태고(太古) 때에는 호(號)는 있었으나 시호는 없었으며, 중고(中古) 때에는 호가 있다가 죽으면 행적에 의거해 시호를 삼았다고 한다. 이와 같다면 자식이 아버지를 논의하는 것이나 신하가 군주를 논의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짐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지금부터는 시호를 정하는 법을 없애노라. 짐은 시황제(始皇帝)라 부른다. 후세부터는 수를 세어 이세(二世), 삼세(三世)에서 만세(萬世)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전하도록 하라.”105)

시황제는 오덕(五德, 오행)의 처음과 끝이 번갈아 이어지는 순서를 헤아려, 주나라는 화덕(火德)을 얻었는데 진나라가 주나라의 덕을 대신했으니 화덕이 이기지 못하는 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야흐로 이제부터는 수덕(水德)이 시작된다고 생각해 한 해의 시작을 바꾸고 조정의 하례식도 모두 10월 초하루에 거행했다. 의복과 깃발과 부절의 색은 모두 검은색을 숭상했다. 숫자는 6을 기준으로 했으니 부절과 법관(法冠)을 모두 여섯 치로 하고 수레 너비는 여섯 자로 했다. 또 여섯 자를 1보(步)라 하고 수레 한 대를 여섯 마리 말이 끌게 했다. 하수의 이름을 덕수(德水)로 바꾸어 수덕의 시작으로 삼았다. 강하고 엄하며 매몰차고 깊이 있게 모든 일을 법에 따라 결정하고, 각박하게 인애, 은혜, 조화, 감정이 배제되었을 때에야 오덕의 수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법을 엄하게 시행하여 법을 어긴 자는 오랜 기간 사면되지 못했다.

승상 왕관 등이 말했다.

“제후들이 막 무너졌지만 연나라, 제나라, 초나라 땅은 멀어서 왕을 두지 않으면 그들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자제분들을 [왕으로] 세울 것을 청하오니 오직 황상께서 허락해 주십시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이 의견을 상의하도록 하자, 신하들이 모두 이롭다고 여겼다. 정위 이사가 이의를 제기했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이 분봉한 자제들은 성이 같은 이들이 매우 많았으나, 이후에 후손들은 사이가 멀어져서 서로 치고받는 것이 마치 원수 같았고, 제후들은 더욱이 서로 죽이고 정벌했는데도 주나라 천자는 이를 막거나 그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폐하의 신령에 힘입어 통일되어 모두 군현(郡縣)으로 삼았으니, 자제들이나 공신들에게 그곳의 부세로써 후한 상을 내리신다면 매우 충분히 쉽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천하에 다른 마음을 품는 이가 없게 하는 것이 편안하게 하는 기술인 것입니다. 제후를 두는 것은 이롭지 않습니다.”

진시황이 말했다.

“천하에 전쟁이 멈추지 않아 모두 고통받고 있는 것은 제후왕이 있기 때문이다. 종묘의 힘을 입어 천하가 막 평정되었는데, 또다시 제후국을 세우는 것은 전쟁의 조짐을 싹틔우는 것이니, 안녕과 휴식을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는가! 정위의 의견이 옳다.”

그러고는 천하를 나누어 서른여섯 군106)을 만들고 군마다 수(守, 군수),107)(尉, 군위),108)(監, 감군)109)을 두었다. 백성을 일컫는 말을 ‘검수(黔首)110)로 고쳤다. 천하에 큰 잔치를 베풀었다.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들여 함양에 모으게 한 후 녹여서 종거(鍾鐻)111)를 만들었는데 무게가 각각 1000석(石)이었으며 궁궐 뜰에 두었다. 법률과 도량의 무게와 길이를 통일했다. 수레의 바퀴 폭을 동일하게 했으며, 문자를 통일했다. 영토가 동쪽으로는 바다 너머 조선(朝鮮)에까지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임조와 강중(羌中)에까지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북향호(北嚮戶)에까지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하수를 근거지로 요새를 만들어 음산(陰山)을 아우르고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전국의 부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켰는데 12만 호였다. 여러 종묘112) 및 장대궁(章臺宮)113)과 상림원(上林苑)114)이 모두 위수의 남쪽 언덕에 있었다. 진나라는 제후들을 쳐부술 때마다 그 궁실을 모방하여 함양의 북쪽 산기슭에 궁궐을 지었다. 남쪽으로는 위수에 닿아 있고 옹문(雍門)으로부터 동쪽으로는 경수와 위수에까지 이르렀는데, 궁전 사이는 구름다리와 주각(周閣)으로 서로 이어져 있다. 제후들로부터 얻은 미인과 종고(鍾鼓)로 그곳을 채워 놓았다.

[시황] 27년, 진시황은 농서와 북지(北地)를 순행하고, 계두산으로 나가 회중(回中)을 지났다. 위수 남쪽에 신궁(信宮)을 지었는데, 얼마 후 신궁의 이름을 극묘(極廟)로 바꾸었다. 이는 북극성을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극묘에서부터 여산까지 길을 뚫고, 감천궁의 전전(前殿)을 지었다. 용도(甬道, 길 양쪽에 담이 있는 도로)를 쌓았는데 함양으로부터 죽 이어졌다. 이해 [천하 남자들의]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 치도(馳道)115)를 닦았다.

04황제의 공덕을 새긴 금석문

[시황] 28년, 진시황이 동쪽으로 가서 군현을 순행하다가 추역산(鄒嶧山)에 올랐다. 비석을 세우고 노(魯) 땅의 유생들을 불러 모아 진나라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문을 새겼으며, 봉선과 산천에 지내는 망제(望祭)의 일을 의논했다. 그러고 나서 마침내 태산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산을 내려오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자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이 일로 인해 그 나무를 오대부(五大夫, 스무 등급 작위 중 아홉 번째)로 봉했다. 양보산(梁父山)에서 땅에 제사를 지냈다. 비석을 세워 글을 새겼다. 글은 다음과 같다.

황제께서 제위에 오르시어 제도를 만들고 법을 밝히시니 신하들은 몸을 닦고 근신하였다. [즉위] 26년에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시니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몸소 먼 곳의 백성들까지 순행하시다가 태산에 올라 동쪽 끝까지 두루 바라보셨다. 따라온 신하가 그 공적을 기리고 사업의 근원을 생각하여 공덕을 기리며 찬양하였다. 치국의 도가 행해지자 천하의 모든 일들이 마땅함을 얻고 모두 법식이 있게 되었다. 큰 뜻이 아름답게 밝혀져 후세에 드리우니 순조롭게 변함없이 계승되리라. 황제께서 몸소 성덕을 베푸셔서 이미 천하를 평정하고 다스림을 게을리하지 않으시도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주무시면서 천하를 이롭게 할 원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가르치는 일과 깨우치는 일에 전념하셨다. 경전의 통달한 이치를 가르치시니 가까운 곳이나 먼 곳이나 전부 다스려져 성스러운 뜻을 모두 받들었다. 귀함과 천함이 분명하게 나뉘고, 남자와 여자는 예의에 따랐으며, 성실히 직분을 받들었다. 안과 바깥이 뚜렷이 구분되고 깨끗하지 않음이 없으니 후세에까지 [가르침이] 베풀어지리라. 교화가 미치는 것이 무궁하니 황제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중요한 훈계를 영원히 이어 갈 것이다.

그러고는 곧바로 발해(勃海)를 끼고 동쪽으로 가서 황현(黃縣)과 추현(睡縣)을 지나 성산(成山) 정상에 이르고 다시 지부산(之罘山)에 올라서 비석을 세워 진나라의 공덕을 노래하고 떠났다. 남쪽으로 낭야산(琅邪山)에 오른 후 크게 기뻐하며 석 달 동안 머물렀다. 이때 백성 3만 호를 낭야산 기슭으로 이주시키고 열두 해 동안 요역을 면제해 주었으며, 낭야대를 지어 비석을 세우고 비문을 새겨 진나라의 공덕을 기리고 뜻을 얻은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즉위한 지] 28년에 황제라고 처음 이름 지었다. 법도를 바로잡으니 만물의 기강이 생겨났다. 인사(人事)를 밝히니 아버지와 아들이 화목해지고, 성스러운 지혜와 인의가 도리를 분명히 드러냈다. 동쪽으로 가시어 그곳 땅을 보살피고 군사들을 살펴보았다. 큰일을 다 마치시니 해안가까지 이르게 되었다. 황제의 공은 근본적인 일에 부지런히 노력하신 것이다. 농업을 숭상하고 말단(상업)을 없애니 백성들이 부유해졌다. 널리 천하의 백성들이 마음을 모아 뜻을 받들었다. 기물과 기계는 도량을 통일하고 책의 문자를 같게 했다. 해와 달이 비추는 곳과 배와 수레가 다니는 곳 모두가 황제의 명을 시행하니 뜻을 얻지 못함이 없었다. 사시에 맞게 일하는 것은 오직 황제뿐이셨다. 서로 다른 풍속을 부지런히 바로잡고자 물을 건너고 땅을 지났다. 백성들의 일을 근심하고 가엽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의혹을 제거하고 법령을 제정하니 모두가 피해야 할 바를 알았다. 지방 장관은 직무를 나누어 모든 정무가 쉽게 다스려졌다. 모든 조치가 합당하여 계획과 같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황제의 명찰함이 사방을 널리 살피시니,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부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차등을 두지 않았다. 간교함과 사악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충정(忠貞)과 현량함만 구하셨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힘을 다하여 감히 게으르거나 소홀함이 없고, 멀거나 가깝거나 외진 곳이라도 오직 엄숙과 장중함으로 임하였다. 바르고 정직하며 돈독하고 충성되어 일이 상궤를 유지하였다. 황제의 덕으로 사해 끝까지 안정되었다. 난을 일으킨 자들을 정벌하여 폐해를 제거하고 이로움을 일으켜 복을 이루었다. 노역을 줄여 주고 때에 맞추어 일을 조절하니 모든 생산물이 번성했다. 백성들이 편안해지니 무기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육친(六親, 부(父), 모(母), 형(兄), 제(弟), 처(妻), 자(子))이 서로 보살피니 마침내 도둑과 적이 없어졌다. 백성들이 기쁘게 교화를 받들며 법령과 제도를 다 알게 되었다. 천지 사방이 모두 황제의 땅이었다. 서쪽으로는 유사를 건너고 남쪽으로는 북호(北戶)의 끝까지 이르렀다. 동쪽으로는 동해(東海)를 포함하고 북쪽으로는 대하(大夏)를 지났다.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는 곳이라면 신하가 아닌 자가 없었다. 황제의 공적은 오제를 뛰어넘고, 은택은 소나 말에게까지 미쳤다. 은덕을 받지 않은 자가 없이 각자 평안한 생활을 누렸다. 오직 진나라 왕만이 천하를 모두 손아귀에 넣은 후 호칭을 세워 황제라 하고, 동쪽 땅을 어루만지고 낭야에 이르렀다. 열후(列侯) 무성후(武城侯) 왕리(王離), 열후 통무후(通武侯) 왕분(王賁), 윤후(倫侯) 건성후(建成侯) 조해(趙亥), 윤후 창무후(昌武侯)(成), 윤후 무신후(武信侯) 풍무택(馮毋擇), 승상 외림(隗林), 승상 왕관, 경(卿) 이사, 경 왕무(王戊), 오대부 조영(趙嬰), 오대부 양규(楊樛)가 모시다가 바다 위에서 [시황의 공적을] 논의해 말했다. “옛 제왕들은 영토가 사방 1000리에 지나지 않았고 제후들은 각자 자기 봉토를 지키면서 어떤 이는 조회에 들고 어떤 이는 들지 않았으며 서로 침략하는 것이 흉악하고 어지러워 잔혹한 정벌이 멈추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금석(金石)에 글을 새겨 자신을 기념했다. 또 옛날 오제와 삼황(三皇)116)은 알고 있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달라서 법도가 분명하지 않게 되자 귀신의 위세를 빌려 먼 곳을 속이니 실제가 명분과 달랐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몸이 미처 죽기도 전에 제후들이 배반하고 모반하여 법령이 실행되지 않았다. 지금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시고 군현을 만드시니 천하가 평화로워졌다. 종묘를 밝히시고 도를 나타내며 덕을 실행하시어 존경스러운 호칭이 크게 이루어졌다. 군신이 서로 함께 황제의 공덕을 노래하며 금석에 새겨 본보기로 삼고자 한다.”

일을 마치고 나자 제나라 사람 서불(徐市) 등이 글을 올려 말했다.

“바닷속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이름하여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신선들이 살고 있으니, 청컨대 재계하고 어린 남녀와 함께 신선을 찾으소서.”

이에 서불을 보내 어린 남녀 수천 명과 함께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게 했다.

진시황이 돌아오다가 팽성(彭城)을 지날 때 재계하고 사당에서 기도한 후 사수에 빠진 주정(周鼎)을 꺼내려 했다. 1000명을 시켜 물에 들어가 찾게 했으나 얻지 못했다. 그러자 곧 서남쪽으로 회수를 건너 형산과 남군으로 갔다. 강수를 타고 상산으로 가서 제사를 지냈다. 큰바람을 만나 거의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진시황이 박사들에게 물었다.

“상군(湘君)은 어떤 신인가?”

박사들이 대답했다.

“듣자니 요임금의 딸이며 순임금의 아내였는데 이곳에 묻혔다고 합니다.”

그러자 진시황은 크게 화를 내며 죄수 3000명을 시켜 상산의 나무를 모두 베게 한 후 그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황제는 남군에서부터 무관(武關)을 거쳐 [함양으로] 돌아왔다.

[시황] 29년,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행했다. 양무현(陽武縣)의 박랑사(博狼沙)에 이르렀는데 강도의 습격을 받아 크게 놀랐다. 강도를 찾으려 했으나 붙잡지 못하자, 천하에 명을 내려 열흘간 대대적으로 수색했다.

지부산에 올라 비석에 글을 새겼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29년, 때는 음력 2월 봄, 봄기운이 바야흐로 일어나려 할 때 황제께서 동쪽으로 행차하시어 순행하다 지부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셨다. 따라온 신하들이 경치를 찬미하며 위대한 업적을 생각하고 창업의 공적을 기리며 노래했다. 위대한 성군께서는 다스림의 도를 만드시고 법도를 만들어 세우시며 기강을 분명히 밝히셨다. 밖으로 제후들을 교화하여 널리 문치(文治)의 은덕을 베풀고 대의와 도리를 밝히셨다. 여섯 나라 군주들이 교화를 회피하며 탐욕과 잔악을 싫어할 줄 모르고 잔혹한 살해를 그치지 않았다. 황제께서는 백성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시니 무덕을 크게 떨치셨다. 정의로 죽이고 신의로 행하시니 위엄이 사방 먼 곳에까지 이르러 신하가 아닌 자가 없었으며, 강제와 폭력을 없애고 백성들을 구제하여 천하를 두루 안정시켰다. 밝은 법도를 널리 베풀어 천하를 다스리시니 영원한 모범이 되셨도다. 성대하시다. 온 세상이 성스러운 뜻을 이어받아 따랐노라. 여러 신하가 공덕을 노래하며 비석에 새겨 변하지 않는 본보기로 드리워 나타내노라.

동쪽을 둘러보고 지은 동관(東觀)의 비문은 이러하다.

29년, 황제께서 봄에 유람하여 먼 곳까지 두루 살펴보셨다. 바다까지 이르러 마침내 지부에 올라 아침 해를 바라보셨다. 광활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다가 따르던 신하들이 모두 다스림의 도가 지극히 밝음을 생각했다. [황제께서는] 성스러운 법령을 일으켜 안으로 국가의 정치를 깨끗하게 정리하시고 밖으로 억세고 난폭한 자들을 주살하셨다. 무예와 위엄을 두루 떨쳐 사방을 진동시키고 여섯 나라 군주를 사로잡아 없앴으며 천하를 병합하여 재해를 멈추고 전쟁을 영원토록 그치게 하셨다. 황제께서는 덕을 밝게 하여 천하를 다스리고 보고 듣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큰 뜻을 세우고 각종 기물을 설치하시니, 신분에 따라 장식과 지표를 만들었다. 신하들은 본분을 준수하고 각기 해야 할 바를 알게 되어 일에 대한 혐오나 의혹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은 풍습을 고쳐 가까운 곳이나 먼 곳이나 법도가 같아지니 나이 들 때까지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 일상 임무를 이미 정해 주셨으니 후손들이 그 일을 이어 간다면 성스러운 다스림은 오래도록 계속될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성스러운 공적을 공경스럽게 노래하며 지부에 비석을 세우기를 간청했노라.

얼마 후 낭야로 갔다가 상당으로 가는 길을 통해 함양으로 들어왔다.

05진을 망하게 할 자

[시황] 30년, 일이 없었다.

[시황] 31년, 12월에 납월(臘月, 음력 12월)의 이름을 가평(嘉平)이라고 고치고, 각 이(里)마다 백성들에게 쌀 여섯 석과 양 두 마리씩을 내려 주었다. 진시황이 함양에서 신분을 숨기고 다니려고 무사 네 사람과 함께 밤에 외출했다가 난지(蘭池)에서 강도를 만나 위험에 빠졌으나 무사들이 강도를 쳐 죽였다. 관중(關中)117)을 20여 일간 대대적으로 샅샅이 뒤졌다. 쌀 한 석 가격이 1600전이었다.

[시황] 32년, 진시황이 갈석산에 갔다가 연나라 사람 노생(盧生)을 시켜 신선이라는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를 찾게 했다. 갈석산의 문에 비문을 새겼다. 성곽을 허물고 제방을 터서 통하게 했다. 그 비문의 글은 이러하다.

마침내 [황제께서] 군대를 일으켜 무도한 자를 베어 죽이고 반역한 자를 없애셨다. 무력으로 포악한 반역자들을 없애고 문치(文治)와 법으로 죄 없는 자들을 보호하시니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복종했다. 은혜로 공로를 헤아려 상이 소나 말에까지 미치니 황제의 은택으로 토양을 기름지게 했다. 황제께서는 위엄을 떨치시고 덕으로 제후들을 제압하셔서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여 크게 태평하게 하셨다. 성곽을 허물고 하천 제방을 터서 통하게 하며 험난하고 막힌 길을 없애셨다. 땅의 형세가 이미 평탄해졌으므로 백성들의 요역이 없어지니 천하가 두루 편안했다. 사내는 밭에서 즐거워하고 아낙은 집안일을 정돈하며, 일에는 각기 순서가 있게 되었다. 은혜가 모든 경작에까지 미쳐 오래도록 떠돌던 사람도 모두 돌아가서 밭을 경작하니 편안하지 않은 이가 없어졌다. 여러 신하들이 빛나는 공적을 노래하고 이 비석에 새겨 후세에 전하여 모범으로 드러내기를 청한다.

진시황이 한종(韓終), 후공(侯公), 석생(石生)을 시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하는 신선의 약을 구하게 했다. 진시황은 북쪽 변경을 순행하다가 상군을 거쳐 들어왔다. 연나라 사람 노생이 파견되어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와 귀신에 관한 일로 『녹도서(錄圖書)118)를 바쳤다.

“진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

진시황은 장군 몽염(蒙恬)119)에게 군사 30만 명을 이끌고 나가서 북쪽으로 호인(胡人)을 치게 하여 하남 땅을 공략하여 점령했다.

[시황] 33년, 예전에 죄를 짓고 도망간 사람, 가난하여 노비가 된 사람, 장사꾼 등을 징발해 육량(陸梁) 땅을 쳐서 빼앗고 계림(桂林), 상군(象郡), 남해(南海)를 군으로 삼은 후 범죄자들을 보내 지키게 했다. 서북쪽으로 흉노를 가려내어 쫓아 버렸다. 유중(楡中)에서부터 하수를 끼고 동쪽으로 음산(陰山)까지 이르러 마흔네 현을 만들고, 하수 가에 성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또 몽염에게 하수를 건너 고궐(高闕), 양산(陽山), 북가(北假) 일대를 빼앗게 하고, 요새를 쌓아 막음으로써 융인(戎人)을 몰아냈다. 유배자들을 이주시켜 새로 설치한 현을 보강했다. 제사를 금지했다. 혜성이 서쪽에서 나타났다.

진시황 본기 1부 끝 ·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