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 本紀
진시황 본기秦始皇本紀
제6편 · 3부
이세황제의 최후, 자영과 진나라의 멸망, 그리고 태사공의 논평
[이세황제] 3년, 장한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거록을 포위하자, 초나라의 상장군(上將軍) 항우(項羽)가 병사들을 데리고 구원하러 갔다. 겨울, 조고는 승상이 되어 마침내 이사를 심판하여 처형했다. 여름, 장한 등이 싸움에서 여러 차례 퇴각하자 이세황제는 사신을 보내 장한을 호되게 꾸짖었다. 장한은 두려움에 떨면서 장사 사마흔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조고는 만나지 않았고 또 믿지도 않았다. 사마흔이 두려워 달아나 버리자 조고가 사람을 시켜 체포하게 했으나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 사마흔이 장한을 만나 말했다.
“조고가 궁중에서 정사를 장악하고 있으니 장군께서 공이 있어도 죽을 것이요, 공이 없어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항우가 진나라의 군대를 기습하여 왕리(王離)를 사로잡으니, 장한의 무리는 마침내 병사들을 이끌고 제후에게 항복했다.
8월 기해일에 조고가 모반을 일으키기로 하고는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되어 먼저 시험해 보려고 사슴을 끌고 와서 이세황제에게 바치며 말했다.
“말입니다.”
이세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틀리지 않았소? 사슴을 말이라 하니 말이오.”
그러고는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어떤 이는 침묵하고, 어떤 이는 말이라고 대답해 조고를 따르며 아부했다. 어떤 이들은 사슴이라고 말했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몰래 법을 빌려 중상모략하였다. 이후로 신하들은 모두 조고를 두려워했다.
조고는 이전에 여러 차례 말했다.
“관동의 도적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항우가 진나라 장수 왕리 등을 거록에서 사로잡은 후 진격하고, 장한의 군대가 여러 차례 퇴각하면서 상소를 올려 지원군을 요청했으며,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 초나라, 한나라, 위나라는 모두 스스로 자리에 올라 왕이 되니, 함곡관 동쪽에서부터 거의 모두 진나라 관리를 배반하고 제후들에게 호응했다. 제후들은 그들 무리를 모두 이끌고 서쪽으로 향했다. 패공이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이미 무관(武關)을 함락시킨 후 사람을 보내 조고와 사사로이 담판을 지었다. 조고는 이세황제가 화가 나 자신을 주살하기에 이를까 두려워 병을 핑계로 조회에 가지 않았다. 이세황제는 흰 호랑이가 자신의 수레 왼쪽을 끄는 말을 물어뜯어 죽이는 꿈을 꾸고 나서 마음이 언짢고 괴상하여 점쟁이에게 꿈에 대해 물었다. 점친 사람이 말했다.
“경수의 수신(水神)이 수작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에 이세황제는 망이궁(望夷宮)에서 재계하고, 경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흰말 네 필을 물에 빠뜨렸다. 그러고는 사신을 보내어 도적에 관한 일을 문책했다. 조고는 두려움 끝에 몰래 사위 함양령(咸陽令) 염락(閻樂), 조성(趙成)과 모의해 말했다.
“황상이 간언을 듣지 않더니 지금 일이 위급해지자 화를 우리 가문에게 돌리려 한다. 나는 천자를 바꿔 공자 영(嬰)을 다시 세우려 한다. 공자 영은 어질고 검소하여 백성들이 모두 그의 말을 따른다.”
낭중령에게 궁 안에서 호응하게 하여 거짓으로 큰 도적이 있다고 하고는 염락에게 관리들을 부르고 군대를 일으키도록 하고 머물게 하였다. 염락을 보내어 사졸 1000여 명을 거느리고 망이궁 전문(殿門)에 가게 하여 위령(衛令)과 복야(僕射)를 결박하고 말했다.
“도적이 이곳까지 들어왔는데 어째서 저지하지 않았느냐?”
위령이 대답했다.
“궁궐 주위를 둘러 군사들을 대단히 삼엄하게 배치했는데 어떻게 도적이 감히 궁으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염락은 드디어 위령을 베고는, 곧장 장수들을 거느리고 궁궐 안으로 들어가 다니면서 활을 쏘아 대니, 낭관(郎官)과 환관들은 매우 놀라 도망치기도 하고 맞서기도 했다. 대항하는 자를 즉시 죽이니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다. 낭중령과 염락은 함께 안으로 들어가 휘장으로 가려진 의자에 활을 쏘았다. 이세황제는 화가 나서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들을 불렀으나, 측근들이 모두 두려워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곁에 환관 한 사람이 있었는데, 시중들며 감히 달아나지 않았다. 이세황제가 안으로 들어가 일러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일찌감치 나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이 지경에 이르게 하다니.”
환관이 대답하여 말했다.
“신이 감히 아뢰지 않았으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신이 일찍 아뢰었더라면 이미 처형되었을 것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염락이 이세황제 앞으로 나아가 그 죄상을 열거하며 말했다.
“당신은 교만하고 방자하며 사람을 죽이는 데 무도하여 천하가 모두 당신을 배반했으니 당신 스스로 생각해 보시오.”
이세황제가 말했다.
“승상을 만나 보면 안 되겠는가?”
염락이 대답했다.
“안 됩니다.”
이세황제가 말했다.
“나는 군(郡) 하나를 얻어 왕이 되길 바라오.”
그러나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말했다.
“만호후(萬戶侯)가 되길 바라오.”
그러나 허락되지 않았다. 또 말했다.
“아내와 자식과 함께 백성이 되어 여러 공자와 나란히 대우받고 싶소.”
염락이 말했다.
“신은 승상의 명을 받아 천하를 위해 당신을 처단하는 것이니, 당신이 말을 더 하더라도 나는 감히 보고할 수 없소.”
그러고는 병졸들을 이세황제에게 나아가도록 지시하자, 이세황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염락이 돌아가 조고에게 보고하니 조고는 여러 대신과 공자들을 모두 불러 이세황제를 처단한 상황을 알리고 말했다.
“진나라는 이전에 왕국이었고 시황제가 천하에서 임금 노릇을 했기 때문에 ‘제(帝)’라고 불렀소. 이제 여섯 나라가 다시 스스로 일어나 진나라의 영토가 줄어들었으니, ‘제’라고 하여 이름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오. 마땅히 예전처럼 ‘왕’이라 해야 합당하오.”
이세황제 형의 아들 공자 자영을 진나라 왕으로 삼았다. 이세황제를 평민의 예로써 두남(杜南)의 의춘원(宜春苑)에 장사 지냈다. 자영에게 재계하고 사당에 들어가 절하게 하고 옥새를 인수하게 했다. 재계한 지 닷새 만에 자영은 아들 두 사람과 의논하여 말했다.
“승상 조고가 이세를 망이궁에서 죽이고 신하들이 그를 죽일까 두려워 거짓으로 대의를 내세워 나를 세운 것이다. 내가 들으니 조고는 초나라와 조약을 맺어 진나라의 종실을 멸망시키고 관중에서 왕 노릇을 하려 한다고 한다. 이제 나에게 재계하고 나서 종묘에 알현하라고 하니, 이는 종묘 안에서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내가 병이라 칭하고 가지 않으면 승상 자신이 반드시 직접 데리러 올 것이니 오면 그를 죽여라.”
조고가 사람을 시켜 몇 차례나 불러도 자영이 가지 않자, 조고가 과연 직접 와서 말했다.
“종묘에 알현하는 일은 중대한 일인데 왕께서는 어찌하여 가지 않으십니까?”
자영이 마침내 재궁(齋宮)에서 조고를 찔러 죽이고 조고의 삼족을 처형하여 함양 백성들에게 보여 주었다.
자영이 진나라 왕이 된 지 46일 만에 초나라의 장수 패공이 진나라 군대를 쳐부수고 무관으로 진입하여 마침내 패상(覇上)에 이르렀다. 패공이 사람을 보내 자영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자영은 즉시 인장 매는 끈을 목에 걸고, 흰말이 끄는 흰 수레를 타고, 천자의 옥새와 부절을 받들고 지도(軹道) 근처에서 투항했다. 패공이 함양에 들어와 궁실 창고를 봉한 후, 패상으로 군대를 이끌고 물러나서 주둔했다.
그 후 한 달 남짓 만에 여러 제후들의 병력이 도착했는데 항우가 맹주가 되었다. 그는 자영과 진나라의 여러 공자와 왕족들을 살해했다. 마침내 함양을 도륙하고 궁실을 불태웠으며 자녀들을 포획하고 진귀한 보물과 재물을 몰수하여 제후들과 함께 나누었다.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서 각각 그 국토를 나누어 셋으로 만들고 옹왕(雍王), 새왕(塞王), 적왕(翟王)이라 이름하고 이를 ‘삼진(三秦)’이라고 불렀다. 항우는 서초 패왕(西楚覇王)이 되어 명(命)을 주관하고 천하를 나누어 제후왕을 봉하니, 진나라는 결국 멸망했다. 5년 뒤 천하는 한(漢)나라에 의해 평정되었다.
태사공은 말한다.
“진나라의 선조 백예는 일찍이 당요(唐堯)와 우순(虞蕣) 시대에 공적이 있어 봉토를 받고 성(姓)을 내려 받았는데, 하 대와 은 대 사이에 이르러 미약해지고 흩어졌다. 주나라가 쇠퇴할 무렵 진나라가 일어나 서쪽 변경 지역에 도읍을 정했다. 목공 이래로 차츰 제후들을 잠식하여 마침내 시황(始皇)이 되었다. 시황제는 스스로 공적이 오제를 뛰어넘고 영토도 삼왕보다 넓다고 여겨서 그들과 나란해지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 훌륭하다, 가생(賈生, 가의(賈誼))127)이 추앙한 말이여! 그는 말한다.
진나라는 산동 제후들의 30여 군(郡)을 손아귀에 넣었고 나루터와 관문을 수리하고 험준한 요새에 의거해 무장한 병사를 정비하여 [그곳을] 수비했다. 그러나 진섭이 수졸(戍卒, 국경을 지키는 군사) 중 어지럽게 흩어졌던 무리 수백 명을 데리고 팔을 휘두르며 큰소리를 쳤다. 활과 창 등 무기를 쓰지 않고 호미와 서까래와 몽둥이를 가지고 민가를 보는 대로 집어삼키며 천하를 거리낌 없이 마구 돌아다녔다. 진나라 사람들은 험난한 형세로써 수비하지 않고 관문과 교량을 닫지 않았으며, 긴 창으로 찌르지 않았고 강한 활도 쏘지 않았다. 초나라 군대가 깊숙이 들어가 홍문(鴻門)에서 싸웠지만 일찍이 가로막는 장애물도 없었다. 이에 산동이 크게 소란스러워져 제후들이 모두 일어나고, 호걸들이 서로 임금 자리에 올랐다. 진나라는 장한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을 정벌하게 했으나 장한은 이를 틈타 삼군(三軍)의 무리에 의지해 바깥에서 협상을 하여 그의 황상에게 모반했다. 군신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자영은 자리에 올라서도 끝내 깨닫지 못했다. 만약 자영에게 평범한 군주의 재능이 있었고 겨우 중간 정도의 재능을 지닌 보좌가 있었다면, 산동이 비록 어지러웠더라도 진나라의 국토는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며, 종묘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진나라의 국토는 산을 등지고 하수를 두르고 있어 견고하니 사방이 요새인 나라였다. 목공 이래로 진나라 왕(시황)에 이르기까지 20여 왕이 늘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것이 어찌 대대로 현명한 군주 때문이겠는가? 진나라의 형세가 그러했기 때문인 것이다. 더구나 천하가 일찍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쳐서 진나라를 공격한 적이 있었다. 이때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들이 모두 늘어섰고 훌륭한 장수가 군대를 지휘하였으며 현명한 재상들이 계책을 서로 교류했지만 [진나라의] 험준한 지세에 막혀 진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진나라는 전투에 끌어들이려고 그들을 위해 관문을 열어 놓으니 백만의 무리가 북쪽으로 도망가 결국에는 무너졌다. 이것이 어찌 용기와 힘과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겠는가? 지형이 불리하고 형세가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나라는 작은 고을을 병합하여 큰 성을 이루고 험준한 요새를 지키며 주둔하여 보루를 높이 쌓고 싸우지 않으면서, 관문을 닫아걸고 험준한 요새에 의지해, 무기를 지니고서 지켰다. 제후들은 평범한 사람으로 일어나 이익으로 연합하였으니 제왕의 덕을 갖춘 사람의 행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교분은 친밀하지도 못했고 그들의 수하들은 따르지 않았으며, 진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으나 실제로는 저마다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저들은 진나라가 험준하여 침범하기 어려움을 알고 분명 군대를 퇴각시킨 것이다. 국토를 평안하게 하고 백성들을 쉬게 하여 다른 나라가 피폐하기를 기다렸다가 약소한 나라를 거두고 피폐한 나라를 도왔지만 대국의 군주를 호령함으로써 천하에서 뜻을 얻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자가 되어 고귀해지고 천하를 소유하여 부유하게 되었는데도 몸이 사로잡히게 된 것은 아마도 패망을 구제하려는 방법이 그릇되어서이다.
진나라 시황제는 자신에게 만족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잘못하고도 끝내 변하지 않았다. 이세황제는 그것을 이어받았으므로 이를 고치지 않고 포악하여 화를 가중시켰다. 자영은 외톨이로 가까운 피붙이도 없었으며, 위태롭고 약했으나 보좌하는 신하가 없었다. 세 군주는 미혹되었으면서도 죽는 날까지 깨닫지 못했으니 패망 또한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당시 세상에 깊은 생각과 변화를 아는 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과감하게 충성을 다하여 황제에게 지적하지 않은 까닭은 진나라의 습속에 꺼리고 피해야 할 금기가 많아서 충성스러운 말이 입에서 미처 끝나기 전에 몸이 죽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천하의 선비로 하여금 귀를 기울여 듣게만 하고 발을 포개고 서서 입을 다문 채 말하지 않게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세 군주가 도를 잃어도 충신들은 감히 간언하지 않았고 지혜로운 자는 감히 계책을 내지 않았으며, 천하가 이미 어지러운데도 간악한 일이 황상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선왕은 언론을 막는 것이 나라를 망치는 것임을 알았기에 공경대부와 선비를 두어 법령을 정비하고 형벌을 설치했으므로 천하가 다스려졌던 것이다. 나라가 강성할 때면 포악함을 금지하고 난을 일으킨 자를 죽여서 천하를 복종시켰다. 나라가 약할 때면 오패(五覇)가 정벌하니 제후들이 순종했다. 영토가 줄어들면 안으로는 지키고, 밖으로는 의지해서 사직이 보존되었다. 그러므로 진나라가 강성하여 법을 복잡하게 하고 형벌을 엄격하게 하여 천하가 두려움에 떨었는데 진나라가 쇠약해지자 백성들이 원망하더니 천하가 배반했다. 그러므로 주나라는 오서(五序)128)가 그 도(道)를 얻어서 1000여 년 동안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진나라는 본말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보면 안정과 위태로움의 기초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속담에 “지난 일을 잊지 않으면 뒷일의 스승이 된다.”라고 했다. 이 때문에 군자가 나라를 다스릴 때는 상고 시대를 자세히 살펴 그 시대에 증험해 보고, 세상일을 참조하여 성쇠의 이치를 관찰하며, 권세의 적합함을 세심히 살피어 버리고 얻는 것에 순서를 두고, 변화는 때에 따르기 때문에 세월이 오래 지속되고 사직도 안정되었던 것이다.
진나라 효공은 효산과 함곡관의 견고함에 의거하여 옹주(雍州, 관중의 요충지) 땅을 지키며 군주와 신하가 굳게 방비하여 주나라 왕실을 살펴보고 있었다. 천하를 석권하여 온 천하를 모아 손아귀에 넣고 사해를 주머니 속에 쓸어 넣고 팔황(八荒, 팔방의 끝으로 아주 먼 곳)을 삼키려는 마음을 품었다. 이때 상군(商君, 상앙)이 그를 보좌하여 안으로는 법과 제도를 세우고 밭갈이와 베 짜기에 힘쓰며 전쟁에 수비하는 장비를 정비하고 밖으로는 연횡책을 써서 제후국들끼리 다투게 하니 이에 진나라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서 서하 바깥 땅을 얻었던 것이다.
효공이 죽자 혜왕과 무왕이 옛 업적을 잇고 [효공이] 남긴 칙서에 따라 남쪽으로 한중을 합치고, 서쪽으로 파와 촉을 취했으며 동쪽으로 기름진 땅을 떼어 받고 지세가 험준한 군을 거두어들였다. 제후들은 두려워하며 맹약하고 진나라를 약하게 할 방도를 모의했다. 진귀한 기물과 중요한 보물과 기름진 땅을 아끼지 않으면서 천하의 선비들을 불러들여 합종으로 교분을 맺고 서로 함께 하나가 되었다. 이때 제나라에는 맹상군이 있었고 조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129)이 있었으며 초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130)이 있었고 위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131)이 있었다. 이 네 군자는 모두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러웠으며, 너그럽고 온후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현인을 존중하고 선비를 중시했다. 합종을 맺고 연횡을 깨뜨렸으며 한나라, 위(魏)나라, 연나라, 초나라, 제나라, 조나라, 송나라, 위(衛)나라, 중산나라의 무리를 합쳤다. 이에 여섯 나라에는 영월(寧越, 조나라 사람), 서상(徐尙, 미상), 소진(蘇秦),132) 두혁(杜赫, 주나라 사람)과 같은 무리가 있어 계책을 세우고, 제명(齊明, 동주의 신하), 주최(周最), 진진(陳軫), 소활(召滑, 초나라 사람), 누완(樓緩, 조나라 재상), 적경(翟景), 소려(蘇厲, 소진의 동생), 악의(樂毅)와 같은 무리가 그 뜻을 통하게 했으며, 오기(吳起), 손빈(孫臏),133) 대타(帶佗, 미상), 아량(兒良, 전국 시대 호걸), 왕료(王廖), 전기(田忌), 염파(廉頗), 조사(趙奢)와 같은 무리가 그 군대를 거느렸다. 일찍이 [진나라의] 열 배가 되는 땅과 100만의 무리를 가지고 함곡관을 두드리며 진나라를 공격했다. [그런데] 진나라 사람들이 관문을 열고 적을 유인하니 아홉 나라 병사들은 멈칫멈칫 뒷걸음치며 달아나면서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진나라는 화살을 잃지도 화살촉을 허비하지도 않았으나 천하의 제후들은 이미 곤경에 빠졌다. 이에 합종은 흩어지고 맹약은 분열되니 앞다투어 땅을 나누어 진나라에 바쳤다. 진나라는 충분한 힘으로 그 피폐해진 나라들을 제압하고 도망간 이들을 추격하여 북쪽으로 뒤쫓으니 엎어진 시체가 100만이었고 흐르는 피에 큰 방패가 떠다녔다. [진나라는 그들의] 이익에 따라 편리함을 틈타 천하를 마음대로 나누고 강과 산을 갈기갈기 찢으니 강한 나라는 항복을 청하고, 약한 나라는 와서 조회했다. 이어서 효문왕과 장양왕은 재위 기간이 짧았으며 나라에 이렇다 할 만한 일은 없었다.
진왕(시황제)에 이르러 여섯 대(효공, 혜문왕, 무왕, 소양왕, 효문왕, 장양왕)가 남긴 공적을 이어받아 긴 채찍을 휘둘러 천하를 거느렸으니, 이주(二周)를 삼키고 제후들을 멸망시켰으며 지존의 자리에 올라 육합(六合, 천지와 사방)을 통치하고 매와 몽둥이를 쥐고 온 천하를 채찍질하매 위세가 사해에 떨쳐졌다. 남쪽으로는 백월(百越)의 땅을 빼앗아 계림(桂林)과 상군(象郡)으로 삼으니, 백월의 군주는 머리를 숙이고 목에 줄을 맨 채 목숨을 진나라의 하급 관리에게 맡겨야 했다. 또 몽염으로 하여금 북쪽에 장성을 쌓아 변방을 지키게 하고, 흉노를 700여 리나 몰아내니 오랑캐들이 감히 남쪽으로 내려와 말을 기르지 못했으며, 병사들은 감히 활을 당겨 [진나라에] 원한을 갚으려 하지 못했다. 이에 선왕의 법도를 없애고 백가(百家)의 책을 불살라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었다. 이름 난 성들을 무너뜨리고 호걸들을 죽였으며 천하의 무기들을 거두어 함양에 모아들인 후 녹여서 종을 만들고 금인(金人, 쇠로 만든 사람) 열두 개를 만들어 일반 백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런 다음 화산을 깎아 성루를 만들고 하수에 의지해 해자를 만들어 억장이나 되는 성에 의거하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골짝에 기대 방비를 굳게 했다. 훌륭한 장수와 강한 쇠뇌가 요새가 되는 곳을 지키고, 믿을 만한 신하와 정예 병사들이 날카로운 무기를 늘어세우고 누가 누군지 검문했으니 천하는 이렇게 평정되었다. 진왕은 마음속으로 관중의 공고함은 1000리나 되는 철벽 성곽과 같아, 자손들이 만대 후까지 제왕이 되게 할 위업이라 스스로 여겼다.
진왕이 이미 죽었는데도 남은 위세는 습속을 달리하는 곳까지 떨쳤다.
진섭은 깨진 항아리 주둥이로 창을 만들고 새끼줄로 문지도리를 맬 정도의 가난한 집 자식이었으며 고용살이하는 노예로서 [변경으로 수자리하러] 옮겨 가는 무리였다. 재능은 보통 사람에도 미치지 못했고 중니(仲尼, 공자)와 묵적(墨翟)과 같은 현명함도, 도주(陶朱, 월나라의 재상인 범려)와 의돈(猗頓, 노나라의 부호)과 같은 부유함도 없었다. 행군하는 틈에 끼어 움직이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굴기하여 지칠 대로 지쳐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느렸으며 수백 명의 무리를 이끌고 가던 길을 바꾸어 진나라를 공격했다.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높이 세워 깃발로 삼으니, 천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메아리가 울려 퍼지듯 호응하며 식량을 짊어지고 그림자처럼 따르매, 산동의 호걸들이 마침내 모두 일어나 진나라의 왕족을 멸망시켰다.
무릇 [진나라의] 천하는 작아지거나 약해지지 않았고 옹주의 땅도 효산과 함곡관의 견고함이 여전했다. 진섭의 지위는 제나라, 초나라, 연나라,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 송나라, 위(衛)나라, 중산나라의 군주들보다 존귀하지 않았다. 호미와 곰방메, 창과 창 자루는 갈고리 창이나 긴 창보다 예리하지 않았다. 수자리 살러 간 무리들은 아홉 나라의 군사들보다 강하지 못했다. 심오한 계책과 원대한 사려, 행군과 용병의 술책은 지난 시대의 모사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는 달랐으며 공적은 서로 반대되었다. 시험 삼아 산동의 나라들과 진섭의 길고 짧음을 재거나 크고 작음을 견주어 권력을 비교하고 능력을 헤아려 보면 같은 해에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진나라는 별 볼 일 없는 땅과 천승(제후의 권력)을 가지고서 여덟 주(州, 아홉 주 중에서 진나라 영토인 옹주를 뺀 나머지 주)의 제후를 불러들여 같은 반열로 조회 들게 하였으니, 100년 남짓한 일이다. 그런 다음 육합을 집으로 삼고 효산과 함곡관을 궁전으로 삼았는데, 한 사내가 난을 일으키자 칠묘(七廟, 효공부터 시황까지의 종묘)가 무너지고 천자의 몸이 남의 손에 죽임을 당하여134)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무엇 때문인가? 인의(仁義)를 베풀지 않은 데 있으니, 공격과 수성의 형세는 서로 다른 것이다.
진나라가 천하를 아우르고 제후들을 겸병하고 남면하여 ‘제’라고 부름으로써 온 천하를 돌보자, 천하의 선비들이 바람을 향하듯 앞다투어 찾아왔으니 이 같은 현상은 무엇 때문인가? 답은 이렇다. 가까운 옛날 이래로 제왕이 된 자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주나라 왕실은 지위가 낮아지고 오패는 이미 죽어 명령이 천하에 실행되지 않아 이 때문에 제후들은 무력으로 정벌하여 강대국은 약소국을 침략하고 대국은 소국을 괴롭히니 전쟁이 끊이지 않아 군사들과 백성들은 지치고 피폐해졌다. 그런데 지금 진나라가 남면하여 천하에 왕 노릇 하니 이것은 위에 천자가 존재하게 된 것이었다. 창생의 근원인 백성들은 그들의 목숨이 안전할 수 있기를 바라니 마음을 비우고 황상을 우러러보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이때 위엄을 지키고 공적을 굳건히 하니, 안정과 위태로움의 관건은 여기에 있다.
진왕은 탐욕스럽고 비루한 마음을 품고는 이기적인 지모를 행하고 공신들을 믿지 않고 선비들과 백성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왕도를 없애고 사사로운 권위를 세워 문서를 금하고 형법을 가혹하게 했으며, 기만과 폭력을 앞세우고 인의를 뒤로하여 포학함을 천하 통치의 시작으로 삼았다. 대체로 천하를 하나로 합친 자는 기만과 무력을 높이 여기며 천하를 안정시킨 자는 권력 변화에 순응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이것은 얻는 것과 지키는 것은 법도가 다름을 말해 준다. 진나라가 전국 시대를 거쳐 천하에 왕 노릇 하면서도 그 도는 바꾸지 않고 그 정치도 개혁하지 않았으니, 이는 천하를 얻고 천하를 지키는 것에 차이가 없었던 까닭이다. 외로이 홀로 천하를 소유했으므로 그의 멸망은 서서 기다리듯 쉬웠던 것이다. 만약 진나라 왕이 지난 세대의 일들을 헤아리고 은나라와 주나라의 자취를 아울러 가지고서 그 정치를 제어했다면, 후에 설령 음란하고 교만한 군주가 있었다 하더라도 기울고 위태로워지는 근심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왕(三王)은 천하를 세워 명성이 아름답게 드러나고 공적이 꽤 오래간 것이다.
이제 진나라 이세가 자리에 오르자 천하에서 목을 빼고 그 정치를 바라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추운 자에게는 해진 짧은 옷이라도 이롭고 굶주린 사람에게는 술지게미라도 달콤하다. 따라서 천하 백성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새로운 군주에게는 오히려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고달픈 백성들에게는 인(仁)을 행하기가 쉽다는 말이다. 만약 이세가 평범한 임금의 품행을 품고 충신과 현인을 임용하고 나서 신하와 임금이 한마음이 되어 세상의 우환을 걱정하고, 소복을 입고서 선제의 잘못을 바로잡으며 봉토를 가르고 백성들을 나누어 공신의 후예들에게 봉해 주고, 제후국을 세우고 군주를 옹립하여 천하를 예로써 다스리고, 감옥을 비우며 사형을 면제해 주고 죄인의 처와 딸을 노비로 삼는 추잡한 죄를 없애 그들을 각기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창고와 곳간을 열어서 재물과 화폐를 나누어 외롭고 곤궁한 선비들을 구제해 주고, 세금을 가볍게 하고 일을 줄여 백성들의 급한 일을 도와주고, 법령을 간략히 하고 형벌을 줄여 그들의 후손을 유지하게 하며, 천하의 백성들에게 모두 스스로 새롭도록 하여 태도를 고치고 행동을 닦으며 각자 몸을 삼가게 하여 모든 사람의 바람을 만족시키고 위엄 있는 인덕으로 천하와 함께했다면 천하가 모여들었을 것이다. 설령 천하 안이 모두 기뻐하며 각자 자기 처지를 편안히 여기고 즐기며, 오직 변란이 생길 것인가만을 걱정하고 교활한 백성들이 있더라도 군주를 배반할 마음이 없다면, 궤도에서 벗어난 신하도 그 지략을 꾸밀 수 없을 것이며 사납고 어지러운 간악함도 멈출 것이다. 이세는 이 방법을 행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무도한 것을 더했으며 종묘와 백성들을 훼손하고 다시 아방궁을 짓기 시작했으며, 형벌을 번잡하게 하여 사형을 엄하게 했고, 관리들의 다스림에 각박함이 심하고 상과 벌은 합당하지 않았으며, 세금의 징수에 한도가 없고 천하에 일이 많아 관리들이 관리할 수 없었으며, 백성들이 곤궁한데도 임금은 구휼하지 않았다. 그러자 간사함과 거짓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위아래 사람이 서로 속이고 죄를 입은 자가 많아져 거리에서 형을 받아 죽는 사람을 보게 되어, 천하가 그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군후(君侯)와 공경(公卿) 이하로부터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스스로 위태롭다는 마음을 품었는데 몸은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처해 모두가 그 위치를 불안해했으므로 쉽게 동요되었다. 진섭이 탕왕과 무왕의 현명함을 갖추지 못하고 공후(公侯)의 존귀함에 의지하지 않았는데도 대택(大澤)에서 팔을 걷어붙이자 천하가 호응한 것은 백성들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 선왕들은 시작과 끝의 변화를 보고서 존망의 기미를 알아 이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삼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데 힘쓸 뿐이었다. 천하에 비록 바른 길에 거스른 행동을 하는 신하가 있어도 분명 호응하는 도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정되어 있는 백성들은 함께 의를 행할 만하나 위험에 처한 백성들은 함께 그릇됨을 행하기가 쉽다.”라고 한 것은 이런 점을 말한 것이다. 귀하여 천자가 되었고 부유하여 천하를 소유했으나 몸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으려는 방법이 잘못되어서이다. 이것이 이세의 잘못인 것이다.
양공은 스스로 자리에 오른 기간이 12년이다. 처음으로 서치를 지었다. 서수에 안장했다. 문공을 낳았다.
문공이 자리에 오르자 서수궁에 머물렀다. 자리에 오른 지 50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서수에 안장했다. 정공을 낳았다.
정공은 즉위하지 못하고 죽었다. 헌공을 낳았다.
헌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이 12년이었으며 서쪽의 새로운 고을에 머물렀다. 죽어서 아(衙)에 안장했다. 무공과 덕공과 출자를 낳았다.
출자는 자리에 오른 기간이 6년이었으며 서릉(西陵)에 머물렀다. 서장인 불기와 위루(威累)와 삼보 세 사람이 도적들을 이끌고 비연(鄙衍)에서 출자를 죽였다. 아에 안장했다. 무공이 자리에 올랐다.
무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12년이었다. 평양의 봉궁에 머물렀다. 선양취(宣陽聚) 동남쪽에 안장했다. 서장 세 사람이 징벌을 받았다. 덕공이 자리에 올랐다.
덕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2년이다. 옹읍의 대정궁에 머물렀다. 선공, 성공, 목공을 낳았다. 양(陽)에 안장했다. 처음으로 복일(伏日)을 정하여 나쁜 기운을 다스렸다.
선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12년이었다. 양궁(陽宮)에 머물렀다. 양에 안장했다. 처음으로 윤월(閏月)을 기록했다.
성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4년이었으며, 옹읍의 궁전에 머물렀다. 양에 안장했다. 제나라가 산융과 고죽을 정벌했다.
목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39년이었다. 주나라 천자가 그의 패주 됨을 치하하였다. 옹에 안장했다. 목공은 저인(著人)에게 배웠다. 강공을 낳았다.
강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12년이었다. 옹읍의 고침(高寢)에 머물렀다. 구사(竘社)에 안장했다. 공공을 낳았다.
공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5년이었고, 옹읍의 고침에 머물렀다. 강공의 남쪽에 안장했다. 환공을 낳았다.
환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27년이었다. 옹읍의 태침(太寢)에 머물렀다. 의리구(義里丘)의 북쪽에 안장했다. 경공을 낳았다.
경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40년이었다. 옹읍의 고침에 머물렀다. 구리(丘里)의 남쪽에 안장했다. 필공(畢公)을 낳았다.
필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36년이었다. 거리(車里)에 안장했다. 이공을 낳았다.
이공은 즉위하지 못했다. 죽어서 좌궁(左宮)에 안장했다. 혜공을 낳았다.
혜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10년이었다. 거리에 안장했다. 도공을 낳았다.
도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15년이었다. 희공(僖公, 노(魯)나라 5대 군왕)의 서쪽에 안장했다. 옹읍에 성을 쌓았다. 자공공(刺龔公)135)을 낳았다.
자공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34년이었다. 입리(入里)에 안장했다. 조공과 회공을 낳았다. 즉위 10년째에 혜성이 나타났다.
조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14년이었다. 수침(受寢)에 머물렀다. 도공의 남쪽에 안장했다. [즉위] 원년에 혜성이 나타났다.
회공은 진(晉)나라에서 돌아왔다. 자리에 오른 기간은 4년이었다. 역(櫟)의 어지(圉氏)에 안장했다. 영공(靈公)136)을 낳았다. 여러 신하들이 회공을 포위하니 회공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숙령공(肅靈公, 영공)은 소자의 아들이다. 경양(涇陽)에 머물렀다. 자리에 오른 기간은 10년이었다. 도공의 서쪽에 안장했다. 간공(簡公)을 낳았다.
간공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왔다. 자리에 오른 기간은 15년이었다. 희공의 서쪽에 안장했다. 혜공(惠公)을 낳았다. 7년째 되던 해 백관들이 처음으로 칼을 차기 시작했다.
혜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13년이었다. 능어(陵圉)에 안장했다. 출공을 낳았다.
출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2년이었다. 출공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옹읍에 안장했다.
헌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23년이었다. 효어(囂圉)에 안장했다. 효공을 낳았다.
효공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24년이었다. 제어(弟圉)에 안장했다. 혜문왕(惠文王)을 낳았다. [자리에 오른 지] 13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함양에 도읍했다.
혜문왕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27년이었다. 공릉(公陵)에 안장했다. 도무왕(悼武王, 무왕)을 낳았다.
도무왕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4년이었다. 영릉(永陵)에 안장했다.
소양왕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56년이었다. 채양(茝陽)에 안장했다. 효문왕을 낳았다.
효문왕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1년이었다. 수릉(壽陵)에 안장했다. 장양왕을 낳았다.
장양왕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3년이었다. 채양에 안장했다. 시황제를 낳았다. 여불위가 상국이 되었다.
헌공이 자리에 오른 지 7년에 처음으로 저잣거리가 섰다. 10년에는 호적을 만들고 다섯 집을 한 조로 삼았다.
효공이 자리에 오른 지 16년에 당시 복숭아와 자두가 겨울에 꽃을 피웠다.
혜문왕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자리에 올랐다. 자리에 오른 지 2년에 처음으로 화폐를 발행했다. 막 태어난 갓난아기가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가 장차 왕 노릇 할 것이다.”
도무왕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자리에 올랐다. 자리에 오른 지 3년에 위수가 사흘 동안 붉어졌다.
소양왕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자리에 올랐다. 자리에 오른 지 4년에 처음으로 논밭의 사잇길을 냈다.137)
효문왕은 쉰세 살에 자리에 올랐다.
장양왕은 서른두 살에 자리에 올랐다. 자리에 오른 지 2년, 태원 땅을 빼앗았다. 장양왕 원년에 대사면을 내리고 선왕의 공신을 표창하여 덕을 베풀고, 가까운 친족을 후대하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동주가 제후들과 함께 진나라를 도모하니 진나라는 상국 여불위를 시켜 그들을 정벌하고, 그 나라를 모두 거둬들였다. 진나라는 동주의 제사를 끊지 않고, 양인 땅을 주군(周君)에게 주어 그 제사를 받들게 했다.
시황이 자리에 오른 기간은 37년이었다. 역읍(酈邑)에 안장했다. 이세황제를 낳았다. 시황은 열세 살에 자리에 올랐다.
이세황제가 자리에 오른 기간은 3년이었다. 의춘에 안장했다. 조고는 승상이 되었고 안무후(安武侯)에 봉해졌다. 이세는 열두 살에 자리에 올랐다.
이상 진나라 양공에서 이세에 이르기까지 60년이 된다.”
효명황제(孝明皇帝, 후한 명제(明帝)) 17년 10월 15일 을축일, [반고(班固)는 『전인(典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나라의 운세는 이미 옮겨 갔으나 인(仁)이 어머니를 대신하지는 못했다.138) 여정(呂政, 진시황)이 자리를 맡았는데 잔인하고 포학했다. 그러나 열세 살짜리 제후가 천하를 하나로 합하여 뜻대로 다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며 종친들을 길러 자라게 했다. 서른일곱 해 동안 무력을 행사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정치 강령을 제정하여 후대의 제왕에게 주었다. 아마도 여정이 성인의 위엄을 얻고 하신(河神)에게 도문(圖文, 하도(河圖))을 받아 낭성(狼星)과 호성(狐星)에 의지하고 삼성(參星)과 벌성(伐星)을 본받으니, 이 네 별이 여정을 도와 적을 몰아내 제거하여 시황제라 부르기에 이른 것이다.
진시황이 죽고 호해가 지극히 어리석어, 여산의 공사가 미처 끝나지 않았는데 다시 아방궁을 지어서 이전의 계획을 마쳤다. 그러고는 말했다.
“천하를 소유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다할 수 있어서인데 대신들은 선왕이 했던 사업을 폐기해 버리려고 생각하는구나.”
이윽고 이사와 풍거질을 죽이고 조고를 임용했다. 가슴 아프다, 이 말이여. 사람의 머리로 짐승처럼 우는 꼴이로구나. 위협하지 않았다면 죄악으로 인해 정벌되지 않았을 것이고, 죄악이 심하지 않았다면 허망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 이르러서도 머무를 수 없었으며, 잔인하고 포악하여 때를 재촉했으니, 비록 지형이 유리한 나라를 차지했다 해도 오히려 국토조차 보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영은 순서를 뛰어넘어 자리를 이을 수 있었고, 옥관(玉冠)을 쓰고 화불(華紱, 아름다운 인수)을 차고, 황색 지붕의 수레를 타며, 관리들을 모두 이끌고 칠묘를 찾아뵈었다. 하찮은 사람이 적당하지 않은 지위에 올라 직무를 잘 처리하지 못해 당황하지 않음이 없었고 눈앞의 안일함만을 날마다 꾀하니, 자영은 홀로 오랫동안 생각하고 근심을 없애고 아버지와 아들이 득실을 따져 가까이로는 집안 내에서 마침내 교활한 신하를 죽임으로써 선왕을 위해 역적을 정벌했다. 조고가 죽은 다음, 빈객과 친지들이 서로의 노고를 채 위로하지도 못하고, 음식이 미처 목구멍을 내려가지도 못했으며, 술이 아직 입술을 적시지도 않았는데 초나라 병사들이 이미 관중을 도륙하고 진인(眞人, 유방)이 패상에 날아드니, 흰 수레에 인수를 매고 황제의 부절과 옥새를 받들어 새로운 천자에게 넘겨주었다. 이는 정백이 두 손에 모정(茅旌)과 난도(鸞刀, 희생을 가르는 데 쓰는 칼)를 들자, 초나라 장왕(莊王)139)이 물러나 버린 것과 같다. 강물은 터지면 다시 막을 수 없고, 물고기는 썩으면 다시 온전하게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가의와 사마천은 말한 것이다. “만약 자영에게 평범한 군주의 재능이 있었고 겨우 중간 정도의 재능을 지닌 보좌가 있었다면, 산동이 비록 어지러웠더라도 진나라의 국토는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며, 종묘 제사가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나라가 쇠퇴한 지 오래되자 천하는 흙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듯 했으니, 비록 주공 단의 재주가 있었더라도 다시는 그 간교함을 펼칠 곳이 없을 터이니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버린 자영을 [가의와 사마천이] 책망한 것은 잘못된 일이구나! 속세에 전하기로는 진시황은 죄악을 일으키고 호해는 죄악이 극에 이르렀다 하니 일리가 있다. 그런데 다시 자영을 책망하며 진나라의 국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른바 시세의 변화를 통찰하지 못한 것이다. [기(紀)나라의] 기계(紀季)가 휴읍(酅邑)을 제나라에 바친 것에 대하여 『춘추』는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나는 「진시황 본기」를 읽다가 자영이 조고를 거열형에 처하는 데에 이르면, 일찍이 그 결단을 탄복하고 그 의지를 애석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영은 삶과 죽음의 도의를 갖추었다.
진시황 본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