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 本紀
진 본기秦本紀
제5편 · 2부
강공(康公)부터 천하통일 직전까지, 그리고 태사공의 논평
강공 원년, 그 전해에 목공이 죽었을 때 진(晉)나라 양공 또한 죽었다. 양공의 동생은 옹(雍)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진나라 여자의 아들로 진나라에서 살았다. 진(晉)나라의 조순(趙盾)이 그를 자리에 세우려고 수회(隨會)를 보내와서 옹을 맞으니, 진나라는 군대를 보내 영호(令狐)까지 그를 호송했다. 진(晉)나라가 양공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진나라 군대에 반격했다. 진나라 군대가 패하자 수회가 도망쳐 왔다.
[강공] 2년, 진나라가 진(晉)나라를 공격하여 무성(武城)을 빼앗고 영호에서의 패배를 보복했다.
[강공] 4년, 진(晉)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여 소량(少梁)을 빼앗았다.
[강공] 6년, 진나라가 진(晉)나라를 공격하여 기마(羈馬)를 빼앗았다. 하곡(河曲)에서 싸워 진(晉)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진(晉)나라 사람들은 수회가 진나라에서 난을 일으킬까 걱정한 끝에 위수여(魏讐餘)를 보내 배반한 체하면서 수회를 만나 함께 계획을 꾸몄다. [위수여가] 수회를 속여서 그 마음을 얻은 후 수회가 마침내 진(晉)나라로 돌아갔다.
강공이 자리에 오른 지 1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공공(共公)이 자리에 올랐다.
공공 2년, 진(晉)나라의 조천(趙穿)이 군주 영공(靈公)을 죽였다.
[공공] 3년, 초나라 장왕이 강대해져 북쪽으로 출병하여 낙읍(雒邑)에 도착해서 주나라의 구정에 대해 물었다. 공공이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환공이 자리에 올랐다.
환공 3년, 진(晉)나라에 패하여 진나라 장수 한 명이 포로로 잡혔다.
[환공] 10년, 초나라 장왕이 정나라를 정복하고, 북쪽으로 나아가서 하수 가에서 진(晉)나라 군대를 패배시켰다. 당시 초나라가 패주가 되어 제후들을 모아 회맹했다.
[환공] 24년, 진(晉)나라 여공(厲公)이 막 자리에 올랐는데, 진나라 환공과 하수를 사이에 두고 맹약했다. 돌아와서 진나라는 맹약을 어기고 적나라와 힘을 합쳐서 일을 꾸민 후 진(晉)나라를 공격했다.
[환공] 26년, 진(晉)나라가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정벌했다. 진나라 군대가 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경수까지 다다라서야 돌아왔다. 환공이 자리에 오른 지 27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경공(景公)이 자리에 올랐다.
경공 4년, 진(晉)나라의 난서(欒書)가 군주 여공을 시해했다.
[경공] 15년, 정나라를 구원하고 역읍(櫟邑)에서 진(晉)나라 군대를 패배시켰다. 이때 진(晉)나라 도공(悼公)이 맹주가 되었다.
[경공] 18년, 진(晉)나라 도공이 강성해져 여러 번 제후와 회맹한 후 그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정벌하러 와서 진나라 군대를 쳐부쉈다. 진나라 군대가 도망치자, 진(晉)나라 병사들이 그들을 뒤쫓아 마침내 경수를 건너고 역림(棫林)에 이르러서야 돌아갔다.
[경공] 27년, 경공이 진(晉)나라에 가서 평공(平公)과 회맹했으나 이내 맹약을 어겼다.
[경공] 36년, 초나라의 공자 위(圍)가 그 군주를 죽이고 스스로 자리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영왕(靈王)이다. 경공의 친동생 후자침(后子鍼)은 총애를 받았다. 경공의 친동생은 부유했는데, [이를 빌미로] 어떤 사람이 그를 모함하자 주살될까 두려워 진(晉)나라로 달아났다. 이때 수레에 싣고 간 재산이 1000대나 되었다. 진(晉)나라 평공(平公)이 말했다.
“후자침, 너는 이처럼 부유한데 어찌하여 스스로 도망쳤는가?”
[후자침이] 대답하여 말했다.
“진나라 왕이 무도하여 죽임을 당할까 두려우니,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가고자 합니다.”
[경공] 39년, 초나라 영왕이 강대해져 신(申)에서 제후들을 불러 모아 맹주가 된 후 제나라의 경봉(慶封)을 죽였다. 경공이 자리에 오른 지 40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애공(哀公)이 자리에 올랐다. 후자침이 다시 진나라로 돌아왔다.
애공 8년, 초나라의 공자 기질(棄疾)이 영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자리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평왕(平王)이다.
[애공] 11년, 초나라 평왕이 와서 진나라 여자를 구하여 태자 건(建)의 아내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나라에 도착해서 보니 여자가 아름다웠으므로 자기가 아내로 맞이했다.
[애공] 15년, 초나라 평왕이 건을 죽이려 하자 건이 도망쳤다. 오자서(伍子胥)92)가 오(吳)나라로 달아났다. 진(晉)나라 왕실은 권력이 낮아지고, 육경(六卿)이 강해져93) 자기들끼리 서로 공격하려고 했으므로, 이 때문에 오랫동안 진나라와 진(晉)나라는 서로 침공하지 않았다.
[애공] 31년, 오나라 왕 합려(闔閭)와 오자서가 초나라를 정벌했다. 초나라 왕은 도망쳐 수(隨)로 달아나고 오나라는 마침내 영(郢)에 입성했다. 초나라의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진나라에] 위급함을 알리러 와서 이레 동안 먹지 않고 밤낮으로 울었다. 이에 진나라는 곧 전차(戰車) 500대를 보내 초나라를 구원하여 오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오나라 군대가 돌아가자 초나라 소왕(昭王)은 다시 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애공이 자리에 오른 지 3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태자는 이공(夷公)이었다. 이공이 일찍 죽어 자리에 오를 수 없었으므로, 이공의 아들이 자리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혜공(惠公)이다.
혜공 원년, 공자가 노(魯)나라 재상의 일을 수행했다.
[혜공] 5년, 진(晉)나라의 경(卿)인 중항씨(中行氏)와 범씨(范氏)가 진(晉)나라를 모반했다. 진(晉)나라가 지씨(智氏)와 조간자(趙簡子)를 시켜 그들을 공격하자 범씨와 중항씨는 도망쳐 제나라로 달아났다. 혜공이 자리에 오른 지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도공(悼公)이 자리에 올랐다.
도공 2년, 제나라의 신하 전걸(田乞)이 군주 유자(孺子)를 시해하고 그의 형 양생(陽生)을 세우니, 이 사람이 바로 제나라 도공(悼公)이다.
[도공] 6년, 오나라가 제나라 군사를 물리쳤다. 제나라 사람이 도공을 시해하고 그 아들 간공(簡公)을 세웠다.
[도공] 9년, 진(晉)나라 정공(定公)과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회맹하여 황지(黃池)에서 맹주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으나 결국 오나라 왕이 앞섰다. 오나라가 강성해지자 중원을 능멸했다.
[도공] 12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간공을 시해하고 그 아우 평공(平公)을 세웠다. 전상이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도공] 13년,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망시켰다. 진나라 도공이 자리에 오른 지 1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여공공(厲共公)이 자리에 올랐다. 공자가 죽은 것은 도공 12년이었다.
01통일 대업의 기초를 다져 가는 과정들
여공공 2년, 촉(蜀)나라 사람이 와서 재물을 바쳤다.
[여공공] 16년, 하수 옆에 참호를 팠다. 병사 2만 명을 보내 [융족] 대려(大荔)를 정벌하고 그 왕성을 빼앗았다.
[여공공] 21년, 처음으로 빈양(頻陽)을 현(縣)으로 삼았다. 진(晉)나라가 무성(武成)을 빼앗았다.
[여공공] 24년, 진(晉)나라에 난이 일어나 지백이 살해되었다. 그 봉토를 나누어 조씨, 한씨, 위씨에게 주었다.
[여공공] 25년, [진(晉)나라의] 지개(智開, 지백의 아들)가 도읍 사람들과 함께 도망쳐 왔다.
[여공공] 33년, [융족] 의거(義渠)를 정벌하여 그 왕을 포로로 잡았다.
[여공공] 34년, 일식이 있었다. 여공공이 죽자 아들 조공(躁公)이 자리에 올랐다.
조공 2년, 남정(南鄭)이 모반했다.
[조공] 13년, 의거가 쳐들어와 위남(渭南)에 이르렀다.
[조공] 14년, 조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 아우 회공(懷公)이 자리에 올랐다.
회공 4년, 서장(庶長, 서출 가운데 장자) 조(鼂)가 대신들과 함께 회공을 포위하자 회공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회공의 태자는 소자(昭子)였는데, 일찍 죽었다. 이에 대신들이 태자였던 소자의 아들을 자리에 오르게 하니, 이 사람이 바로 영공(靈公)이다. 영공은 회공의 손자이다.
영공 6년, 진(晉)나라가 소량에 성을 쌓자 진나라가 그곳을 공격했다.
[영공] 13년, 적고(籍姑)에 성을 쌓았다. 영공이 죽었으나 아들 헌공(獻公)이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영공의 막내 숙부 도자(悼子)가 자리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간공(簡公)이다. 간공은 소자의 동생이자 회공의 아들이다.
간공 6년, 관리에게 처음으로 칼을 차게 했다. 낙수에 참호를 팠다. 중천(重泉)에 성을 쌓았다.
[간공] 16년, [간공이] 죽자 아들 혜공(惠公)이 자리에 올랐다.
혜공 12년, 아들 출자(出子)가 태어났다.
[혜공] 13년, 촉나라를 공격하여 남정을 빼앗았다. 혜공이 죽자 출자가 자리에 올랐다.
출자 2년, 서장 개(改)가 하서에서 영공의 아들 헌공(獻公)을 맞이하여 자리에 오르게 했다. 출자와 그의 어머니를 죽인 후 깊은 물에 빠뜨렸다. 이때 진나라가 여러 차례 임금을 바꾸면서 군신 관계가 어그러지고 혼란스러웠으므로, 진(晉)나라가 다시 강성해져 진나라의 하서 땅을 빼앗았다.
헌공 원년, 순장제를 폐지했다.
[헌공] 2년, 역양(櫟陽)에 성을 쌓았다.
[헌공] 4년, 정월 경인일에 효공(孝公)이 태어났다.
[헌공] 11년, 주나라의 태사 담이 헌공을 만나서 말했다.
“애초에 주나라와 진나라는 하나였으나 나누어졌습니다. 그러나 나누어진 지 500년 만에 다시 합쳐질 것이며, 합친 지 17년 후에는 패왕이 나타날 것입니다.”
[헌공] 16년, 복숭아나무가 겨울에 꽃을 피웠다.
[헌공] 18년, 역양에 황금색 비가 내렸다.
[헌공] 21년, 진(晉)나라와 석문(石門)에서 싸워 수급 6만을 베니, 천자가 수놓은 예복을 보내 축하했다.
[헌공] 23년, 위나라와 소량에서 싸워 그 장수 공손좌(公孫痤)를 포로로 잡았다.
[헌공] 24년, 헌공이 죽자 아들 효공이 자리에 올랐다. 나이가 스물한 살이었다.
효공 원년, 하수와 효산 동쪽으로 강대국 여섯이 있었다. 효공은 이들 제나라 위왕(威王), 초나라 선왕(宣王), 위나라 혜왕(惠王), 연나라 도후(悼侯), 한나라 애후(哀侯), 조나라 성후(成侯)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회수와 사수 사이에는 작은 나라 10여 개가 있었다. 초나라와 위나라는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었다. 위나라는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그 영토가] 정현(鄭縣)에서부터 낙수를 따라 북쪽으로 상군(上郡)을 포함했다. 초나라는 한중(漢中)에서부터 남쪽으로 파군(巴郡)과 검중(黔中)을 포함했다. 주나라 왕실이 약해지자 제후들은 무력으로 정벌하고 투쟁하여 서로 영토를 아울렀다. 진나라는 옹주에 따로 떨어져 있어 중원 지역 제후의 회맹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오랑캐처럼 대우받았다. 이에 효공은 은혜를 베풀고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며, 전사를 모집하고 공적과 포상을 명확히 했다. 나라에 명을 내려 말했다.
“옛날 우리 목공께서는 기산(岐山)과 옹읍(雍邑) 사이에서 덕을 닦고 무예를 펼쳐서 동쪽으로는 진(晉)나라의 난을 평정하고 하수를 경계로 삼았으며, 서쪽으로는 융적을 제패하시고 영토를 1000리나 넓히셨다. 이에 천자가 작위를 내리시니 제후들이 모두 축하했다. 후세를 위해 대업을 여시니 매우 빛나고 아름다웠다. 그 이전의 여공, 조공, 간공, 출자의 때에는 편안하지 않아 나라 안에 근심이 있었으므로 미처 바깥의 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를 틈타 삼진이 우리 선왕의 하서 땅을 빼앗았고, 제후들은 진나라를 낮추어 보니 부끄럽기가 이보다 큰 것이 없었다. 헌공께서 즉위한 후 변방 지역을 진정시켜 위로하고, 역양으로 [도읍을] 옮겨서 다스렸으며, 또 동쪽으로 정벌하여 목공 때의 옛 땅을 회복하고 목공의 정치 강령을 재정비하였다. 나는 선왕의 뜻을 되새겨 생각할 때마다 항상 마음이 아팠다. 빈객과 여러 신하들 중에서 진나라를 강성하게 해 줄 뛰어난 계책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나 또한 그 관직을 높여 주고 그에게 봉토를 나누어 줄 것이다.”
이에 곧이어 군대를 내보내 동쪽으로는 섬성(陝城)을 포위하고, 서쪽으로는 융족의 원왕(獂王)을 베었다.
이 명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위앙(衛鞅)은 서쪽으로 진나라에 들어가 경감(景監)에게 부탁하여 효공을 알현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효공] 2년, 천자가 제육(祭肉, 제사에 올린 고기)을 보내왔다.
[효공] 3년, 위앙이 법령을 바꾸고 형벌을 정비하며, 안으로는 농사일에 힘쓰고 밖으로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자들에 대한 상벌을 분명히 할 것을 권하자,94) 효공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감룡(甘龍)과 두지(杜摯) 등은 그렇게 여기지 않아 위앙과 서로 다투었다. 결국 위앙의 법령을 쓰자 [처음에는] 백성들이 괴로워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나자 백성들이 오히려 그것을 편하게 여겼다. 이에 위앙을 임명하여 좌서장(左庶長)으로 삼았다. 이 일은 「상군 열전(商君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효공] 7년, 위나라 혜왕(惠王)과 두평(杜平)에서 회맹했다.
[효공] 8년, 위나라와 원리(元里)에서 싸워 공을 세웠다.
[효공] 10년, 위앙이 대량조(大良造, 스무 등급의 작위 중 열여섯 번째 등급)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의 안읍(安邑)을 포위해 항복을 받았다.
[효공] 12년, 함양성(咸陽城)을 건설하고 기궐(冀闕)을 지은 후 진나라는 그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여러 작은 마을을 아울러 한데 모아 큰 현을 만들고, 현마다 현령 한 사람을 두니 현 마흔한 곳이 생겼다. [기존의 정전제로] 가로세로로 구획된 밭을 개간했다. 동쪽으로 영토가 낙수를 넘어섰다.
[효공] 14년, 처음으로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다.
[효공] 19년, 천자가 작위를 내렸다.
[효공] 20년, 제후들이 모두 축하했다. 진나라는 공자 소관(少官)에게 군대를 이끌고 봉택(逢澤)에서 제후와 회맹하고 천자를 알현하게 했다.
[효공] 21년, 제나라가 마릉(馬陵)에서 위나라를 쳐부쉈다.
[효공] 22년, 위앙이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 공자 앙(卬, 공손연(公孫衍)의 오기인 듯함)을 포로로 잡았다. 위앙을 열후로 봉하고, 상군(商君)이라고 불렀다.
[효공] 24년, 삼진의 위나라와 안문(雁門)에서 싸워 그 장수 위조(魏錯)를 포로로 잡았다.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혜문군(惠文君)이 자리에 올랐다. 이해 위앙을 죽였다. 위앙이 처음 진나라를 위해 법령을 펼칠 때 법이 잘 시행되지 않았는데, 때마침 태자가 금령을 어겼다. 위앙이 말했다.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귀족과 왕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왕께서 반드시 법을 시행하고자 한다면, 태자의 일에서 솔선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태자가 경형을 받을 수는 없으니 그 스승이 경형을 받게 하소서.”
이에 법령이 크게 쓰여 진나라 사람들이 다스려졌다. 효공이 죽었을 때 태자가 자리에 올랐는데, 종실 사람들 가운데 위앙을 원망하는 이가 많았다. 위앙이 도망치자 이를 빌미로 모반했다고 하고서는 결국 거열형(車裂刑, 수레에 사지를 묶어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한 후 [그 시신을] 진나라를 순행하며 백성들에게 보였다.
혜문군 원년, 초나라, 한나라, 조나라, 촉나라 사람이 와서 알현했다.
[혜문군] 2년, 천자가 축하했다.
[혜문군] 3년, 왕이 관례(冠禮)를 치렀다.
[혜문군] 4년, 천자가 문왕과 무왕의 제육을 보내왔다. 제나라와 위나라도 왕을 칭했다.
[혜문군] 5년, 음진(陰晉) 사람 서수(犀首)가 대량조가 되었다.
[혜문군] 6년, 위나라가 음진을 바치니 음진의 이름을 영진(寧秦)으로 고쳤다.
[혜문군] 7년, 공자 앙이 위나라와 싸워 그 장수 용가(龍賈)를 포로로 잡고 8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
[혜문군] 8년, 위나라가 하서 땅을 바쳤다.
[혜문군] 9년, 하수를 건너 분음(汾陰)과 피지(皮氏)를 얻었다. 위나라 왕과 응(應)에서 회맹했다. 초(焦)를 포위하여 항복시켰다.
[혜문군] 10년, 장의(張儀)95)가 진나라 재상이 되었다. 위나라가 상군의 열다섯 현을 바쳤다.
[혜문군] 11년, 의거를 현으로 삼았다. 위나라에 초성(焦城)과 곡옥(曲沃)을 돌려주었다. 의거의 군주가 신하를 칭했다. 소량의 이름을 하양(夏陽)으로 고쳤다.
[혜문군] 12년, 처음으로 납제(臘祭, 한 해의 끝인 12월에 금수를 사냥하여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를 거행했다.
[혜문군] 13년, 4월 무오일에 위나라 군주가 왕을 칭하고, 한나라 또한 왕을 칭했다. 장의를 보내 섬현(陝縣)을 공격해 빼앗게 하고, 그곳 사람들을 내쫓아 위나라로 보냈다.
[혜문군] 14년, [혜문왕] 원년으로 바꾸었다.
[혜문왕] 2년, 장의가 제나라와 초나라의 대신과 설상(齧桑)에서 만났다.
[혜문왕] 3년, 한나라와 위나라의 태자가 조회하러 왔다. 장의가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혜문왕] 5년, 혜문왕이 순행하다가 북하(北河)에 이르렀다.
[혜문왕] 7년, 악지(樂池)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연나라, 제나라가 흉노를 거느리고 함께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는 서장 질(疾)을 보내 수어(修魚)에서 싸우게 하니, 그들의 장수 신차(申差)를 포로로 잡고 조나라 공자 갈(渴)과 한나라 태자 환(奐)을 무찔러 수급 8만 2000을 베었다.
[혜문왕] 8년, 장의가 다시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혜문왕] 9년, 사마조(司馬錯)가 촉나라를 정벌해 멸망시켰다. 조나라의 중도(中都)와 서양(西陽)을 정벌해 빼앗았다.
[혜문왕] 10년, 한나라 태자 창(蒼)이 볼모로 왔다. 한나라의 석장(石章)을 정벌하여 빼앗았다. 조나라 장수 니(泥)를 정벌하여 쳐부쉈다. 의거의 스물다섯 성을 정벌하여 빼앗았다.
[혜문왕] 11년, 저리질(樗里疾)이 위나라의 초성을 공격해 항복을 받았다. 안문(岸門)에서 한나라 군대를 쳐부수고 수급 1만을 베었고, 한나라 장수 서수(犀首)가 달아났다. 공자 통(通)을 촉 땅에 봉했다. 연나라 군주가 신하 자지(子之)에게 선양했다.
[혜문왕] 12년, 진나라 왕이 양나라 왕과 임진(臨晉)에서 회맹했다. 서장 질이 조나라를 공격하여 조나라 장수 장(莊)을 포로로 잡았다. 장의가 초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혜문왕] 13년, 서장 장(章)이 단양(丹陽)에서 초나라를 쳐서 초나라 장수 굴개(屈丐)를 포로로 잡고 수급 8만을 베었다. 또 한중에서 초나라를 공격하여 땅 600리를 빼앗고, 한중군(漢中郡)을 설치했다. 초나라가 옹지를 포위하자 진나라는 서장 질로 하여금 한나라를 돕고 동쪽으로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며, 도만(到滿)은 위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침공했다.
[혜문왕] 14년, 초나라를 정벌해 소릉(召陵)을 빼앗았다. 단(丹)과 리(犁)가 신하를 칭했다. 촉 재상 진장(陳壯)이 촉후(蜀侯)를 죽이고 항복했다.
혜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무왕(武王)이 자리에 올랐다. 한나라, 위나라, 제나라, 초나라, 월나라가 모두 진나라에 복종했다.
무왕 원년, 위나라 혜왕(惠王)과 임진에서 회맹했다. 촉 재상 진장을 죽였다. 장의와 위장(魏章)이 모두 동쪽으로 떠나 위나라로 갔다. [진나라 군대가] 의거, 단, 리를 정벌했다.
[무왕] 2년, 처음으로 승상(丞相)을 두었는데, 저리질과 감무(甘茂)가 각각 좌승상(左丞相)과 우승상(右丞相)이 되었다. 장의가 위나라에서 죽었다.
[무왕] 3년, 한나라 양왕(襄王)과 임진 바깥에서 회맹했다. 남공게(南公揭)가 죽자 저리질이 한나라 재상이 되었다. 무왕이 감무에게 말했다.
“내가 용거(容車, 의전용 수레)를 타고 삼천(三川)을 지나 주나라 왕실을 살펴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
그해 가을에 감무와 서장 봉(封)으로 하여금 의양을 정벌하게 했다.
[무왕] 4년, 의양을 함락하고 수급 6만을 베었다. 하수를 건너 무수(武遂)에 성을 쌓았다. 위나라 태자가 조회하러 왔다. 무왕은 힘이 세고 놀이를 좋아하여 역사(力士) 임비(任鄙), 오획(烏獲), 맹열(孟說)이 모두 높은 관직에 이르렀다. 무왕이 맹열과 큰 솥 들어 올리기를 겨루다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8월에 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맹열을 멸족시켰다. 무왕은 위나라 여자를 얻어 왕후로 삼았는데 자식이 없었다. 이복동생이 자리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소양왕(昭襄王)이다. 소양왕의 어머니는 초나라 사람으로, 성은 미씨(羋氏)이며 선 태후(宣太后)라고 불렸다. 무왕이 죽었을 때 소양왕은 연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으나, 연나라 사람이 돌려보내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소양왕 원년, 엄군질(嚴君疾)이 승상이 되었다. 감무가 떠나서 위나라로 갔다.
[소양왕] 2년, 혜성이 나타났다. 서장 장(壯)이 대신, 제후, 공자와 함께 반역을 일으켰다가 모두 주살되었다. 혜문후(惠文后, 혜문왕의 왕비)까지도 모두 제명에 죽지 못했다. 도무왕후(悼武王后, 무왕의 왕후인데 무왕이 죽은 직후이므로 ‘도’ 자를 덧붙임)는 떠나서 위나라로 돌아갔다.
[소양왕] 3년, 소양왕이 관례를 행했다. 초나라 왕과 황극(黃棘)에서 회맹하고, 상용(上庸)을 초나라에 돌려주었다.
[소양왕] 4년, 포판(蒲阪)을 빼앗았다. 혜성이 나타났다.
[소양왕] 5년, 위나라 왕이 응정(應亭)으로 조회하러 오자, 포판을 다시 위나라에 돌려주었다.
[소양왕] 6년, 촉후 휘(煇)가 모반하자, 사마조가 촉을 평정했다. 서장 환(奐)이 초나라를 정벌하고 수급 2만 명을 베었다. 경양군(涇陽君, 소양왕의 동복동생)이 제나라에서 볼모가 되었다. 일식이 일어나 낮인데도 어두웠다.
[소양왕] 7년, 신성을 점령했다. 저리자(樗里子, 저리질)가 죽었다.
[소양왕] 8년, 장군 미융(羋戎)을 보내 초나라를 공격하고 신시(新市)를 빼앗았다. 제나라는 장자(章子)를, 위나라는 공손희(公孫喜)를, 한나라는 포연(暴鳶)을 보내 함께 초나라의 방성(方城)을 공격하게 하여 당매(唐眛)를 사로잡았다. 조나라가 중산(中山)나라를 무찌르자, 그 왕이 달아나서 결국 제나라에서 죽었다. 위나라 공자 경(勁)과 한나라 공자 장(長)이 제후가 되었다.
[소양왕] 9년, 맹상군(孟嘗君)96) 설문(薛文)이 진나라에 와서 승상이 되었다. 환(奐)이 초나라를 공격해 여덟 성을 빼앗고, 초나라 장수 경쾌(景快)를 죽였다.
[소양왕] 10년, 초나라 회왕(懷王)이 진나라에 조회하려고 입국했는데 진나라는 그를 억류했다. 설문이 금수(金受)의 이간질로 면직되었다. 누완(樓緩)이 승상이 되었다.
[소양왕] 11년, 제나라,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 송나라, 중산나라 등 다섯 나라가 함께 진나라를 공격했는데 염지(鹽氏, 위나라 땅 이름)에 이르러서야 돌아갔다. 진나라는 한나라와 위나라에 하수 이북 및 봉릉(封陵)을 주고 강화를 맺었다. 혜성이 나타났다. 초나라 회왕이 달아나 조나라로 갔지만, 조나라가 받아 주지 않자 다시 진나라로 돌아왔다. 그 직후 [초나라 회왕이] 세상을 떠나니 [초나라로] 돌려보내 장사 지내게 했다.
[소양왕] 12년, 누완이 면직되자, 양후(穰侯) 위염(魏冉)이 승상이 되었다. [진나라가] 초나라에 식량 5만 석을 주었다.
[소양왕] 13년, 향수(向壽)가 한나라를 정벌해 무시(武始)를 빼앗았다. 좌경(左更) 백기가 신성을 공격했다. 오대부(五大夫) 여례(呂禮)가 떠나서 위나라로 도망쳤다. 임비가 한중 태수(漢中太守)97)가 되었다.
[소양왕] 14년, 좌경 백기가 이궐에서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여 수급 24만을 베고, 공손희를 포로로 잡았으며, 다섯 성을 점령했다.
[소양왕] 15년, 대량조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원(垣)을 빼앗았다가 다시 돌려주었다. 초나라를 침공하여 완(宛)을 빼앗았다.
[소양왕] 16년, 좌경 사마조가 지성(軹城)과 등성(鄧城)을 빼앗았다. 위염이 면직되었다. 공자 시(市)를 완(宛) 땅에, 공자 회(悝)를 등(鄧) 땅에, 위염을 도(陶) 땅에 봉하여 제후로 삼았다.
[소양왕] 17년, 성양군(城陽君)이 조회하러 들어왔고 동주의 왕도 조회하러 왔다. 진나라는 원성을 포판 및 피지와 바꾸었다. 진나라 왕이 의양으로 갔다.
[소양왕] 18년, 사마조가 원과 하옹(河雍)을 공격하여 다리를 끊고 두 땅을 빼앗았다.
[소양왕] 19년, 소양왕이 서제(西帝)라 칭하고, 제나라 민왕(閔王)이 동제(東帝)라 칭했다가, 모두 다시 취소했다. 여례가 스스로 투항해 왔다. 제나라가 송나라를 쳐부쉈을 때 송나라 왕은 위나라에 있다가 온(溫)에서 죽었다. 임비가 죽었다.
[소양왕] 20년, 진나라 왕이 한중에 갔다가 다시 상군과 북하에 갔다.
[소양왕] 21년, 사마조가 위나라의 하내 땅을 공격했다. 위나라가 안읍을 바치자 진나라는 그곳 사람들을 내쫓은 후 사람들을 모아 하동(河東)으로 이주시키고 작위를 주었다. 또 사면받은 죄인도 그곳으로 옮기게 했다. 경양군을 완 땅에 봉했다.
[소양왕] 22년, 몽무(蒙武)가 제나라를 정벌했다. 하동에 아홉 현을 설치했다. 초나라 왕과 완에서 회맹했다. 조나라 왕과 중양(中陽)에서 회맹했다.
[소양왕] 23년, 도위(都尉, 군수의 일 처리를 도와주는 자리로 군위(郡尉)와 같은 지위) 사리(斯離)가 삼진 및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정벌하고 제수 서쪽에서 제나라를 쳐부쉈다. 진나라 왕이 위나라 왕과 의양에서, 한나라 왕과 신성에서 회맹했다.
[소양왕] 24년, 초나라 왕과 언(鄢)에서 회맹했고, 또 양(穰)에서 회맹했다. 진나라가 위나라 안성(安城)을 빼앗고 대량(大梁)에 이르렀는데, 연나라와 조나라가 구원했으므로 진나라 군대가 떠났다. 위염이 승상에서 면직되었다.
[소양왕] 25년, 조나라의 성 둘을 점령했다. 한나라 왕과 신성에서, 위나라 왕과 신명읍(新明邑)에서 회맹했다.
[소양왕] 26년, 죄인을 사면하여 양(穰)으로 이주시켰다. 양후 위염이 다시 승상이 되었다.
[소양왕] 27년, 사마조가 초나라를 침공했다. 죄인을 사면하여 남양으로 이주시켰다. 백기가 조나라를 침공하여 대(代)나라의 광랑성(光狼城)을 빼앗았다. 또 사마조로 하여금 농서(隴西)에서 출발하여 촉을 지나 초나라의 검중을 공격해 점령하게 했다.
[소양왕] 28년에 대량조 백기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언과 등을 빼앗고 죄인을 사면하여 이주시켰다.
[소양왕] 29년, 대량조 백기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영을 빼앗아 남군(南郡)으로 만드니, 초나라 왕은 달아났다. 주나라 왕이 왔다. 진나라 왕이 초나라 왕과 양릉(襄陵)에서 회맹했다. 백기가 무안군(武安君)이 되었다.
[소양왕] 30년, 촉군 군수 장약(張若)이 초나라를 정벌하여 무군(巫郡) 및 강남(江南)을 빼앗아 검중군(黔中郡)을 만들었다.
[소양왕] 31년, 백기가 위나라를 정벌하여 성 둘을 빼앗았다. 초나라 사람이 강남에서 진나라에 모반을 일으켰다.
[소양왕] 32년, 승상 양후(위염)가 위나라를 공격했다. 대량에 이르러 포연을 쳐부수고 수급 4만을 베었다. 포연은 달아나고 위나라는 세 현을 바쳐 강화를 청했다.
[소양왕] 33년, 객경(客卿) 호양(胡陽)이 위나라의 권성(卷城), 채양(蔡陽), 장사(長社)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또 화양에서 망묘(芒卯)를 공격하여 쳐부수고 수급 15만을 베었다. 위나라가 남양을 바치며 강화를 청했다.
[소양왕] 34년, 진나라는 위나라와 한나라에 상용 땅을 주어 군 하나를 만들게 하고, 남양의 면직된 신하들을 그곳으로 이주해 살게 했다.
[소양왕] 35년, 한나라, 위나라, 초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정벌했다. 처음으로 남양군(南陽郡)을 설치했다.
[소양왕] 36년, 객경 조(竈)가 제나라를 침공하여 강(剛)과 수(壽)를 빼앗아 양후에게 주었다.
[소양왕] 38년, 중경(中更) 호양이 조나라의 알여(閼與)를 공격했으나 빼앗을 수 없었다.
[소양왕] 40년, 도태자(悼太子)가 위나라에서 죽어서 돌아왔는데 지양(芷陽)에 안장했다.
[소양왕] 41년, 여름에 위나라를 침공하여 형구(邢丘)와 회(懷)를 빼앗았다.
[소양왕] 42년, 안국군(安國君)이 태자가 되었다. 10월에 선 태후가 죽자 지양의 여산에 안장했다. 9월에 양후가 떠나서 도(陶)로 갔다.
[소양왕] 43년, 무안군 백기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성 아홉 개를 점령하고 수급 5만을 베었다.
[소양왕] 44년, 한나라의 남양을 공격해 빼앗았다.
[소양왕] 45년, 오대부 분(賁)이 한나라를 침공하여 성 열 개를 빼앗았다. 섭양군(葉陽君) 회(悝)가 도성을 떠나 봉지로 가다 미처 도착하지 못하고 죽었다.
[소양왕] 47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상당(上黨)을 공격하자 상당이 조나라에 항복했다. 이 일로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했으며, 조나라 역시 군대를 보내 진나라를 쳤으므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진나라가 무안군 백기를 시켜 공격한 끝에 장평(長平)에서 조나라를 크게 무찌른 후 [그 군대] 40여만 명을 모조리 죽었다.
[소양왕] 48년, 10월에 한나라가 원옹(垣雍)을 바쳤다. 진나라가 군대를 삼군으로 나누었다. 무안군이 돌아왔다. 왕흘(王齕)이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의 무안(武安)과 피뢰(皮牢)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사마경(司馬梗)이 북쪽으로 태원을 평정하고, 한나라의 상당을 모두 소유했다. 정월에 군대는 전투를 멈추고 다시 상당을 수비하도록 했다. 그해 10월에 오대부 능(陵)이 조나라의 한단(邯鄲)을 침공했다.
[소양왕] 49년, 정월에 병사를 더 출동시켜 능을 도왔다. 능이 전투에 빼어나지 못하자 면직하고, 왕흘이 대신 장수가 되었다. 그해 10월에 장군 장당(張唐)이 위나라를 공격했는데 채위(蔡尉)가 지키지 못하고 군대를 잃자 돌아와서 그 목을 베었다.
[소양왕] 50년, 10월에 무안군 백기가 죄를 지어 사병이 되어 음밀(陰密)로 유배되었다. 장당이 정나라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12월에 병사를 더 보내서 분성(汾城) 옆에 주둔하게 했다. 무안군 백기가 죄를 지어 죽었다. 왕흘이 한단을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하고 도망쳐 군대를 거두어 분성으로 달아났다. 두 달 동안 진(晉)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수급 6000을 베니 강에 떠다니는 진(晉)나라 군인과 초나라 군인의 시체가 2만 구에 이르렀다. 분성을 공격하고, 그 즉시 장당을 좇아 영신중(寧新中)을 점령한 후, 영신중의 이름을 안양(安陽)으로 바꾸었다. 처음으로 하수에 다리를 만들었다.
[소양왕] 51년, 장군 규(摎)가 한나라를 공격해서 양성(陽城)과 부서(負黍)를 빼앗고 수급 4만을 베었다. 또 조나라를 공격하여 20여 현을 빼앗고 9만 명을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았다. 서주(西周)의 군주(무공)가 진나라를 배반하고 제후들과 맹약을 맺은 후 여러 나라의 정예 군대를 이끌고 이궐을 나와 진나라를 공격해 진나라가 양성(陽城)과 통행할 수 없게 했다. 이에 진나라는 장군 규를 시켜 서주를 공격했다. 서주의 왕이 달려와 스스로 항복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인정하고 서른여섯 군데 성읍과 인구 3만을 모두 바쳤다. 진나라 왕은 바친 것을 받아들이고 주나라로 왕을 돌려보냈다.
[소양왕] 52년, 주나라 백성들은 동쪽으로 도망쳤고, 주나라의 기물 구정이 진나라로 들어왔다. 주나라가 쇠망하기 시작했다.
[소양왕] 53년, 천하의 모든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서 복종했다. 위나라가 나중에 늦게 오자 진나라는 규를 시켜 위나라를 정벌하고 오성(吳城)을 빼앗았다. 한나라 왕이 조회하러 들어왔으며, 위나라도 나라를 [진나라에] 맡기고 명령에 따랐다.
[소양왕] 54년, 왕이 옹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소양왕] 56년, 가을에 소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효문왕(孝文王)이 자리에 올랐다. [효문왕은] 당팔자(唐八子, 효문왕의 친어머니)를 높여서 당 태후(唐太后)로 삼고 선왕과 합장했다. 한나라 왕은 직접 상복을 입고 입국하여 조문했으며, 다른 제후들은 모두 장군과 승상으로 하여금 조문하고 상례를 보게 했다.
효문왕 원년, 죄인들을 사면하고, 선왕 때의 공신들을 표창했으며, 친척들을 포상하고 두텁게 예우했으며 임금의 정원을 허물었다. 10월 기해일, 효문왕이 상복을 벗고 자리에 올랐으나, 사흘 만인 신축일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장양왕(莊襄王)이 자리에 올랐다.
장양왕 원년, 죄인을 크게 사면하고 선왕 때의 공신들을 표창했으며, 덕을 베풀어 친족을 두텁게 예우하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내렸다. 동주의 군주가 제후들과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도모하자 진나라는 상국 여불위(呂不韋)98)를 시켜 그를 죽이고 그 나라를 모두 진나라에 편입했다. 진나라는 주나라의 제사를 끊지 않고 양인(陽人) 땅을 주군(周君)에게 내려 주어 그 제사를 받들게 했다. 몽오(蒙鷔)에게 한나라를 정벌하게 하니, 한나라가 성고(成皐)와 공(鞏)을 바쳤다. 진나라의 국경이 대량에 이르렀고, 처음으로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했다.
[장양왕] 2년, 몽오를 보내 조나라를 공격하여 태원을 평정했다.
[장양왕] 3년, 몽오가 위나라의 고도(高都)와 급(汲)을 침공하여 점령했으며, 조나라의 유차(楡次), 신성, 낭맹(狼孟)을 공격하여 서른일곱 군데 성을 빼앗았다. 4월에 일식이 있었다. 왕흘이 상당을 공격했다. 처음으로 태원군(太原郡)을 설치했다. 위나라 장수 무기(無忌)가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진을 공격하자, 진나라는 하수 바깥으로 물러났다. 몽오가 패배하여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다. 5월 병오일에 장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정(政)이 자리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진시황제(秦始皇帝)이다.
진나라 왕 정은 자리에 오른 지 26년 만에 처음으로 천하를 합병하여 서른여섯 개의 군을 만들었으며, 호칭을 시황제(始皇帝)라고 했다. 시황제가 쉰한 살에 죽자 아들 호해(胡亥)가 제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이세황제(二世皇帝)이다.
[이세황제] 3년, 제후들이 모두 일어나 진을 배반하니 조고(趙高)가 이세를 죽이고 자영(子嬰)을 자리에 세웠다. 자영이 제위에 오른 지 한 달여 만에 제후들이 그를 죽이고,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이 이야기는 「시황 본기(始皇本紀, 진시황 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태사공은 말한다.
“진나라 조상은 성이 영씨(嬴氏)이다. 그 후손이 나누어 봉해져 봉국 이름으로 성씨를 삼으니, 서씨(徐氏), 담씨(郯氏), 거씨(莒氏), 종려씨(終黎氏), 운엄씨(運奄氏), 도구씨(菟裘氏), 장량씨(將梁氏), 황씨(黃氏), 강씨(江氏), 수어씨(修魚氏), 백명씨(白冥氏), 비렴씨(蜚廉氏), 진씨(秦氏)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진나라는 그 조상 조보(造父)가 조성(趙城)에 봉해졌으므로 조씨(趙氏)가 되었다.”
진 본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