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 本紀
진 본기秦本紀
제5편 · 1부
진나라의 시조 전설부터 목공(穆公)이 서융의 패자가 되기까지
01가축 번식 덕에 영씨 성을 얻다
진(秦)나라90)의 선조는 전욱제의 후예 여수(女脩)라고 한다. 여수가 베를 짜고 있는데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자, 여수가 그것을 삼키고 아들 대업(大業)을 낳았다. 대업은 소전(少典)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여화(女華)라 불렀다. 여화는 대비(大費)를 낳았는데, 우(禹)와 함께 물과 땅을 다스렸다. 공을 이루고 나자 순임금은 우에게 현규를 내렸다. 우가 받으며 말했다.
“제가 [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대비가 도왔습니다.”
순임금이 말했다.
“아, 그대 비(費)여, 우를 도와 공을 이루었으므로 그대에게 조유(皁游, 깃발을 장식하는 검은색 끈)를 내리니, 그대의 후손은 장차 크게 번창할 것이다.”
그러고는 요씨(姚氏) 성의 미녀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대비는 절하며 받고 나서 순임금을 도와 새와 짐승을 조련했다. 그가 많은 새와 짐승들을 길들이니, 새와 짐승들은 대부분 길들여졌다. 이 사람이 바로 백예(柏翳)이다. 순임금이 그에게 영씨(嬴氏)를 성으로 내렸다.
대비는 아들 둘을 낳았다. 첫째는 대렴(大廉)이라고 불리며 조속씨(鳥俗氏)이고, 둘째는 약목(若木)이라 불리며 비씨(費氏)이다. 약목의 현손(玄孫)은 비창(費昌)이다. 그 자손 중에 어떤 이는 중원(中原)에 살았고 어떤 이는 오랑캐 땅에 살기도 했다. 비창은 하나라의 걸왕 때에 하나라를 떠나 상나라에 귀순하여 탕왕을 위해 수레를 몰며 명조에서 걸왕을 쳐부쉈다. 대렴의 현손은 맹희(孟戱)와 중연(中衍)인데, 새의 몸을 하고서 사람의 말을 했다. [상나라의] 대무제(大戊帝, 태무제(太戊帝)라고도 함)가 그 소문을 듣고 그들에게 수레를 몰게 할지를 점치니 길했다. 마침내 그들에게 수레를 몰게 하고 아내를 얻어 주었다. 태무제 이래로 중연의 후손들은 마침내 대대로 공을 세우고 은나라를 도왔으므로, 영씨들은 성씨를 널리 빛내고 마침내 제후가 되었다.
중연의 현손은 중휼(中潏)인데 서융 땅에 있으면서 서술(西垂, 서쪽 변방)을 지켰다. [중휼이] 비렴(蜚廉)을 낳았다. 비렴은 오래(惡來)를 낳았다. 오래는 힘이 세고 비렴은 달리기를 잘해서, 부자 두 사람이 함께 재주와 힘으로 은나라 주왕을 섬겼다. 주나라 무왕이 주왕을 정벌하면서 함께 오래를 죽였다. 이때 비렴이 주왕을 위하여 북방에서 석관(石棺)을 만들었는데, 돌아와서 보고할 곳이 없자 곽태산(霍太山)에 제단을 쌓아 알렸다. 그러고 나서 석관을 얻었는데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
“천제께서는 처보(處父, 비렴의 자)로 하여금 은나라에 재난이 깃들지 못하게 하고, 석관을 하사하여 씨족을 번창하게 하노라.”
비렴이 죽자 곽태산에 장사 지냈다. 비렴에게는 다른 아들이 있었는데 계승(季勝)이라 불렸다. 계승은 맹증(孟增)을 낳았다. 맹증은 주나라 성왕의 총애를 받았으니, 이 사람이 바로 택고랑(宅皐狼)이다. 고랑은 형보(衡父)를 낳았고, 형보가 조보(造父)를 낳았다. 조보는 마차를 잘 몰았으므로 주나라 목왕의 총애를 받았다. 목왕은 기(驥), 온려(溫驪), 화류(驊駵), 녹이(騄耳)라는 수레 끄는 말 네 필을 얻자, 서쪽으로 순행을 떠나서는 즐거워서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 서언왕(徐偃王)이 난을 일으키자 조보는 목왕을 위해 수레를 몰았다. 이때 오래도록 말을 달려 주나라로 돌아오는데 하루에 1000리를 달려 난을 평정했다. 목왕이 조성(趙城)을 조보에게 봉하니, 조보의 가족은 이때부터 조씨(趙氏)가 되었다. 비렴이 계승을 낳은 이래로 5대째인 조보에 이르러서 조성에서 따로 살았다. 조최(趙衰, 진(晉)나라의 대부)가 그 후손이다. 오래혁(惡來革, 오래)은 비렴의 아들인데, 이른 나이에 죽었다. 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여방(女防)이라고 했다. 여방은 방고(旁皐)를 낳고, 방고는 태기(太幾)를 낳았으며, 태기는 대락(大駱)을 낳고, 대락은 비자(非子)를 낳았다. 이들은 조보가 총애를 받은 덕으로 모두 조성을 이어받으면서 성이 조씨가 되었다.
비자는 견구(犬丘)에 살았는데, 말과 가축을 좋아했고 사육과 번식에도 뛰어났다. 견구 사람들이 그 사실을 주나라 효왕에게 말하자, 효왕은 비자를 불러 견수(汧水)와 위수 사이에서 말을 책임지도록 하니 말이 크게 번식했다. 효왕은 비자로 대락의 뒤를 잇고자 했다. 그러나 신후(申侯)의 딸이 대락의 아내가 되어 아들 성(成)을 낳으니 성이 적자가 되었다. 신후가 즉시 효왕에게 말했다.
“옛날 저의 선조가 여산(酈山)에 살 때 낳은 딸을 융족 서헌(胥軒)의 아내로 삼아 중휼을 낳아서 [융족과] 서로 친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주나라에 귀의한 후 서수(西垂)를 지키게 되었고, 또 그 때문에 서수가 평화롭고 화목했습니다. 지금 제가 다시 대락에게 딸을 시집보내어 적자인 성을 낳았습니다. 저와 대락이 거듭 혼인을 맺어 서융족이 모두 복속했으므로, 왕께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왕께서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에 효왕이 말했다.
“옛날 백예가 순임금을 위해 가축을 책임졌는데, 가축이 많이 번식했으므로 봉토를 얻고 영씨 성을 받았다. 지금 그 후손이 또한 나를 위해 말을 번식시켰으니, 나는 그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어 부용국(附庸國, 속국)으로 삼겠노라.”
그러고는 진(秦) 땅에 봉한 후, 그에게 다시 영씨의 제사를 잇게 하고는 진영(秦嬴)이라 불렀다. 또 신후의 딸을 폐하지 않고 대락의 적자로 삼아 서융과 평화롭게 지냈다.
진영이 진후(秦侯)를 낳았다. 진후는 자리에 오른 지 10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진후가 공백(公伯)을 낳았다. 공백은 자리에 오른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공백이 진중(秦仲)을 낳았다.
진중이 자리에 오른 지 3년 만에 주나라 여왕이 무도하여 제후들 중에 배반하는 자가 생겼다. 서융도 주나라 왕실에 반기를 들고 견구 땅에 사는 대락의 일족을 멸했다. 주나라 선왕이 자리에 오르자 진중을 대부(大夫)로 삼아 서융을 주살하려 했다. 그러나 도리어 서융이 진중을 죽였다. 진중은 자리에 오른 지 23년 만에 서융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맏아들을 장공(莊公)이라 했다. 선왕이 장공의 다섯 형제를 불러 병사 7000명을 주고 서융을 치게 하여 그들을 쳐부쉈다. 이에 선왕은 다시 진중의 후손에게 상을 내리고, 그 선조인 대락의 땅 견구까지 아우르게 했으며, 서수의 대부로 삼았다.
02망한 나라의 신하가 어찌 자문에 임하리오
장공은 일족의 옛 땅 서견구(西犬丘)에 살면서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세보(世父)이다. 세보가 말했다.
“서융이 내 할아버지 진중을 죽였으니, 나는 융족의 왕을 죽이지 않고는 봉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마침내 서융을 치려고 아우 양공(襄公)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양공이 태자가 되었다. 장공이 자리에 오른 지 4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태자인 양공이 대신하여 자리에 올랐다.
양공 원년, 양공의 여동생 무영(繆嬴)이 풍왕(豊王)의 아내가 되었다.
양공 2년, 융족이 견구를 포위하자 세보가 그들을 공격했다가 도리어 포로가 되었다. 1년이 넘자 융족이 다시 세보를 돌려보냈다.
[양공] 7년 봄, 주나라 유왕이 포사를 총애해 태자를 폐하고 포사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웠다. 유왕이 몇 차례나 제후들을 기만하자 제후들은 유왕에게 등을 돌렸다. 서융의 견융족이 신후와 함께 주나라를 공격해 여산 아래에서 유왕을 죽였다. 이에 진나라 양공이 군대를 이끌고 주나라를 구하러 갔는데, 온 힘을 다해 싸운 끝에 공을 세웠다. 주나라가 견융의 난을 피해 동쪽의 낙읍으로 옮기니, 양공은 군대를 이끌고 주나라 평왕을 호송했다. 평왕이 양공을 제후로 봉하고 기산 서쪽 땅을 내려 주며 말했다.
“융족이 무도하여 우리의 기산과 풍읍 땅을 빼앗았다. 진나라 융족을 공격하여 그들을 쫓아낸다면 즉시 그 땅을 갖게 될 것이다.”
평왕은 양공과 서약하면서 봉지와 작위를 내렸다. 양공은 이때 처음으로 나라를 갖게 되어 다른 제후들과 사절을 갖추어 서로 방문하고 예의로써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유구(駵駒, 검은색 갈기에 몸이 붉은 어린 말), 황우(黃牛, 누런 소), 저양(羝羊, 숫양 세 마리)을 써서 서치(西畤, 서현의 제사터)에서 상제(上帝)께 제사 지냈다.
[양공] 12년, 양공은 서융을 정벌하기 위해 기산에 나아갔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양공이 문공(文公)을 낳았다.
문공 원년, [문공은] 서수궁(西垂宮)에서 지냈다.
[문공] 3년, 문공은 병사 700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다.
[문공] 4년, 견수와 위수가 만나는 곳에 이르렀다. 문공이 말했다.
“옛날 주나라가 이곳을 우리 선조 진영에게 봉읍으로 내렸고, 그 후 마침내 우리는 제후가 되었지.”
그러고는 그곳이 살 만한 곳인지 점치게 했는데, 점괘가 길했으므로 즉시 그곳에 도읍을 세웠다.
[문공] 10년, 처음으로 부치(鄜畤, 부현에 있는 제사터)를 만들어 삼뢰(三牢, 소, 양, 돼지)를 써서 제사 지냈다.
[문공] 13년, 처음으로 사관(史官)을 두어 일을 기록하니, 많은 백성들이 교화되었다.
[문공] 16년, 문공이 병사를 이끌고 서융을 정벌하니, 서융이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문공은 주나라의 유민들을 거두었고, 영토는 기산까지 이르렀으며, 기산 동쪽 지역을 주나라에 바쳤다.
[문공] 19년, 진귀한 보물을 얻었다.
[문공] 20년, 처음으로 삼족을 죽이는 형벌을 제정했다.
[문공] 27년, 남산의 큰 가래나무를 베자 풍수(豊水)에 큰 소가 나타났다.
[문공] 48년, 문공의 태자가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정공(竫公)이라 했다. 정공의 맏아들이 태자가 되니, 이 사람은 문공의 손자이다.
[문공] 50년, 문공이 죽자 서산(西山)에 안장했다. 정공의 아들이 자리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영공(寧公)이다.
영공 2년, 영공이 평양(平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군대를 파견해 탕사(蕩社)를 정벌했다.
[영공] 3년, 박(亳)나라와 싸웠다. 박나라 왕이 서융으로 달아나자 드디어 탕사를 멸했다.
[영공] 4년, 노(魯)나라의 공자 휘(翬)가 군주 은공(隱公)을 시해했다.
[영공] 12년, 탕씨(蕩氏)를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았다. 영공이 열 살에 자리에 오른 지 1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서산에 안장했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맏아들인 무공(武公)이 태자가 되었다. 무공의 동생 덕공(德公)은 [무공과] 생모가 같았고, 노희자(魯姬子)가 출자(出子)를 낳았다. 영공이 죽자 대서장(大庶長)인 불기(弗忌), 위루(威壘), 삼보(三父)가 태자를 폐하고 출자를 군주로 세웠다.
출자 6년, 삼보 등이 다시 함께 모의하여 도적을 시켜 출자를 살해했다. 출자는 다섯 살에 자리에 오른 지 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삼보 등은 다시 옛 태자 무공을 군주로 세웠다.
무공 원년, 팽희씨(彭戱氏)를 정벌하러 갔다가 화산 아래에 이르러 평양의 봉궁(封宮)에서 거했다.
[무공] 3년, 삼보 등을 죽이고 그 삼족을 멸했다. 이는 그들이 출자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정나라 고거미(高渠眯)가 그 군주 소공(昭公)을 죽였다.
[무공] 10년, 규(邽)와 기(冀) 땅의 융족을 정벌하고, 처음으로 그곳에 현(縣)을 두었다.
[무공] 11년, 처음으로 두(杜)와 정(鄭) 땅에 현을 두었다. 소괵(小虢, 강족(姜族)의 하나)을 멸했다.
[무공] 13년, 제나라 사람 관지보(管至父), 연칭(連稱) 등이 그 군주 양공(襄公)을 죽이고 공손무지(公孫無知)를 군주로 세웠다. 진(晉)나라가 곽(霍)나라, 위나라, 경(耿)나라를 멸망시켰다. 제나라의 옹름(雍廩)이 공손무지, 관지보 등을 죽이고 제나라 환공을 세웠다. 제나라와 진(晉)나라가 강국이 되었다.
[무공] 19년, 진(晉)나라의 곡옥(曲沃)이 처음으로 진후(晉侯)가 되었다. 제나라 환공이 견(鄄)에서 패자가 되었다.
[무공] 20년, 무공이 세상을 떠나자 옹 땅의 평양에 안장했다. 처음으로 사람을 따라 죽게 했는데, 따라 죽은 사람이 예순여섯 명이었다. 무공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을 백(白)이라 했다. 백은 즉위하지 못하고 평양에 봉해졌다. 무공의 동생 덕공이 자리에 올랐다.
덕공 원년, 처음으로 옹성의 대정궁(大鄭宮)에 거했다. [소, 양, 돼지] 각각 300마리를 희생으로 삼아 부치에서 제사 지냈다. 옹성에서 거하는 것이 좋은지를 점치니, “후대 자손들이 하수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게 될 것이다.”라는 점괘가 나왔다. 양백(梁伯)과 예백(芮伯)이 조회하러 왔다.
[덕공] 2년, 처음으로 복날을 정하여, 개로 열독(熱毒)과 사기(邪氣)를 막았다. 덕공은 서른세 살에 자리에 오른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들 셋을 낳았다. 맏아들은 선공(宣公)이고, 둘째 아들은 성공(成公)이며, 막내아들은 목공(穆公)이다. 맏아들 선공이 자리에 올랐다.
선공 원년, 위(衛)나라와 연나라가 주나라를 공격해 혜왕(惠王)을 내쫓고 왕자 퇴(穨)를 세웠다.
[선공] 3년, 정백(鄭伯)과 괵숙(虢叔)이 왕자 퇴를 죽이고 혜왕을 다시 세웠다.
[선공] 4년, 밀치(密畤)를 만들고, 진(晉)나라와 하양(河陽)에서 싸워 이겼다.
[선공] 12년, 선공이 세상을 떠났다. 선공은 아들을 아홉이나 낳았지만, 아무도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선공의 동생 성공이 자리에 올랐다.
성공 원년, 양백과 예백이 조회하러 왔다. 제나라 환공이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성공] 4년, 성공이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일곱이었으나 아무도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그 동생 목공이 자리에 올랐다.
목공 임호(任好) 원년, 목공이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모진(茅津)을 정벌하여 승리했다.
[목공] 4년, 목공이 진(晉)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했는데, 진(晉)나라 태자 신생(申生)의 누나였다. 그해 제나라 환공이 초나라를 정벌하여 소릉(邵陵)에 이르렀다.
[목공] 5년, 진(晉)나라 헌공(獻公)이 우(虞)나라와 괵나라를 멸망시키고, 우나라 임금과 대부 백리해(百里奚, 백리혜(百里傒)라고도 함)를 포로로 잡았다. 이는 진(晉)나라 헌공이 옥과 말을 우나라 임금에게 뇌물로 주었기 때문이다. 백리해를 사로잡은 후 [진(晉)나라 헌공은] 딸이 목공의 부인으로 시집갈 때 잉신으로 진나라에 보냈다. 백리해는 진나라에서 도망쳐 [초나라] 완(宛) 땅으로 갔으나, 초나라 변방에 사는 사람이 그를 붙잡았다. 목공은 백리해가 어질다는 것을 듣고 많은 재물을 치러서라도 그를 데려오려 했으나, 초나라 사람들이 내주지 않을까 염려했다. 이에 사람을 보내 초나라에 일러 말했다.
“나의 잉신인 백리해가 여기 있는데, 청컨대 검정 숫양 가죽 다섯 장으로 그의 몸값을 치르고자 한다.”
초나라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여 백리해를 내주었다. 이때 백리해는 나이가 이미 일흔 살이 넘었다. 목공은 감옥에 갇힌 백리해를 풀어 주고 그와 함께 국사를 논의하려고 했다. 그러자 백리해가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망한 나라의 신하인데 어찌 자문할 수 있겠습니까!”
목공이 말했다.
“우나라 임금이 그대를 등용하지 않아서 망했으니 그대 죄가 아니오.”
그러고는 묻기를 고집하여 사흘 동안 이야기했다. 목공은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나랏일을 맡기면서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 불렀다. 백리해가 다시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제 친구 건숙(蹇叔)에 미치지 못합니다. 건숙은 현명한데도 세상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신이 세상을 떠돌다가 제나라에서 곤경에 빠져 질(銍) 땅의 사람들에게 걸식했는데 건숙이 신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신은 이 일로 인해 제나라 왕 공손무지를 섬기고자 했으나 건숙이 신을 말렸습니다. 그래서 신은 제나라의 난91)을 벗어나 마침내 주나라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나라 왕자 퇴가 소를 좋아한다기에 신은 소 기르는 재주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퇴가 신을 쓰려고 할 때 건숙이 신을 말렸기에 신은 떠나서 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나라 임금을 섬기자 건숙이 다시 신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신은 우나라 임금이 신을 쓰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사사로이 녹봉과 관직이 탐나 잠시 머물렀습니다. 두 번은 그의 말을 들어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한 번은 듣지 않아 우나라 임금의 재난을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그가 현명하다는 것을 압니다.”
이에 목공은 사람을 보내 많은 예물을 들여 건숙을 맞이하고 상대부(上大夫)로 삼았다.
가을이 되자 목공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진(晉)나라를 정벌하러 가서 하곡(河曲)에서 싸웠다. 진(晉)나라의 여희(驪姬)가 난을 일으켜 태자 신생이 신성(新城)에서 죽었고,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는 빠져나와 도망쳤다.
[목공] 9년, 제나라 환공이 규구(葵丘)에서 제후들을 불러 모았다.
진나라 헌공이 세상을 떠났다. 여희의 아들 해제(奚齊)를 세웠으나, 그 신하 이극(里克)이 해제를 죽였다. 순식(荀息)이 탁자(卓子)를 세웠으나 이극이 또 탁자와 순식을 죽였다. 이오는 진나라에 사람을 보내 진(晉)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청했다. 이에 목공이 허락하고 백리해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이오를 호송하게 했다. 이오가 말했다.
“만약 제가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진(晉)나라 하서(河西) 땅의 여덟 성을 떼어 진나라에 주겠습니다.”
이오가 귀국해 자리에 올랐지만, 비정(丕鄭)을 보내 진나라에 감사만 했을 뿐 약속을 어기고 하서의 성을 주지 않았다. 이오가 이극을 죽였다. 비정이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목공과 의논하며 말했다.
“진(晉)나라 사람들은 이오를 바라지 않고, 실제로는 중이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이오가 진나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이극을 죽인 것은 모두 여생(呂甥)과 극예(郤芮)의 계략입니다. 원컨대 임금께서는 재물로 여생과 극예를 급히 불러들이시고, 여생과 극예가 오면 다시 중이를 들여보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목공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사람을 보내 비정과 함께 진(晉)나라로 돌아가게 한 후 여생과 극예를 부르게 했다. 여생과 극예 등은 비정이 간자(閒者)가 아닌가를 의심하고 즉시 이오에게 말하여 비정을 죽였다. 비정의 아들 비표(丕豹)가 진나라로 달아나서 목공을 설득하여 말했다.
“진(晉)나라 군주는 무도하여 백성들이 가까이하지 않으니 정벌할 만합니다.”
목공이 말했다.
“백성들이 진실로 [왕을] 불편하게 여긴다면 어떻게 대신(비정)을 죽일 수 있었겠는가? 대신을 죽일 수 있었다면 이는 백성들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청을 들어주지 않고, 은밀히 비표를 등용했다.
[목공] 12년, 제나라의 관중과 습붕(隰朋)이 죽었다.
진(晉)나라가 가뭄이 들자 식량을 요청하러 왔다. 비표가 목공에게 식량을 내주지 말고 기근을 틈타 정벌하라고 설득했다. 목공이 공손지(公孫支)에게 물으니, 공손지가 답했다.
“기근과 풍년은 번갈아 일어나니,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리해에게 물으니, 백리해가 말했다.
“이오가 임금께 죄를 지은 것이지, 그의 백성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에 목공은 백리해와 공손지의 의견을 받아들여 결국 식량을 내주었다. 배에 실어 나르고 수레로 옮겨 옹성(雍城)에서 강성(絳城)까지 줄줄이 이어졌다.
[목공] 14년, 진나라에 기근이 들자 진(晉)나라에 식량을 요청했다. 진(晉)나라 군주는 여러 신하들과 이 일을 논의했다. 괵사(虢射)가 말했다.
“기근을 틈타 정벌하면 큰 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자 진(晉)나라 군주가 그 말을 따랐다.
[목공] 15년, [진(晉)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목공도 군대를 일으켜 비표를 장수로 삼고 친히 나아가서 싸웠다. 9월 임술일, 진(晉)나라 혜공(惠公) 이오와 한나라 땅에서 모여 싸웠다. 진(晉)나라 군주가 군대를 버려둔 채 진나라와 이익을 다투고 돌아오다가 말이 진흙에 빠졌다. 목공과 그 부하가 급히 말을 달려 쫓았으나, 진(晉)나라 군주를 잡을 수 없었고 도리어 진(晉)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했다. 진(晉)나라 군사들이 목공을 공격하여 목공이 부상을 입었다. 이때 기산 아래에서 목공의 좋은 말을 훔쳐 먹었던 백성들 300명이 진(晉)나라 군사에게 뛰어들었다. 진(晉)나라 군사는 포위망을 풀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목공은 탈출하여 오히려 진(晉)나라 군주를 사로잡아 버렸다. 예전에 목공이 좋은 말을 잃어버렸는데, 기산 아래에 살던 야인들이 함께 잡아먹어 버렸다. 그 수가 300명이 넘었는데, 관리가 그들을 쫓아가 잡아들여 법으로 처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목공이 말했다.
“군자는 짐승 때문에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되오. 내가 듣건대 좋은 말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오히려 사람을 손상시킨다고 하오.”
그러고는 모두에게 술을 내리고 그들을 사면해 주었다. 그들 300명은 진나라가 진(晉)나라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뒤따를 것을 청했다. 그러다가 목공이 포위당한 것을 보자, 모두 무기를 들고 필사적으로 싸워 말을 먹은 은덕에 보답했다. 이에 목공은 진(晉)나라 군주를 포로로 잡아 돌아와서는 나라에 영을 내려 말했다.
“재계하고 쉴지어다. 내가 장차 진(晉)나라 군주를 제물로 상제께 제사 지내리라.”
주나라 천자가 이 소식을 듣고 “진(晉)나라 군주는 나와 성이 같다.”라고 하면서 진(晉)나라 군주를 위해 사면을 청했다. 이오의 누나는 또한 목공의 부인이었다. 부인이 그 말을 듣자 상복을 입은 채 맨발로 달려와 애원했다.
“소첩의 형제들이 서로 구해 줄 수 없어, 당신 명을 욕되게 했습니다.”
목공이 말했다.
“나는 진(晉)나라 군주를 사로잡아 공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천자께서는 [사면을] 요청하고 부인은 이를 걱정하는구려.”
그러고는 진(晉)나라 군주와 맹약을 한 뒤 돌려보낼 것을 허락하고, 좋은 숙소로 바꿔 머물게 하고, 일곱 가지 음식으로 대접했다. 11월, 진(晉)나라 군주 이오를 돌려보내니, 이오는 하서(河西) 땅을 바치고 태자 어(圉)를 진나라에 볼모로 보냈다. 진나라는 태자 어에게 종실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 이때 진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 하수에까지 이르렀다.
[목공] 18년, 제나라 환공이 세상을 떠났다.
[목공] 20년, 진나라가 양나라와 예나라를 멸망시켰다.
[목공] 22년에 진(晉)나라 공자 어가 진(晉)나라 군주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양나라는 내 어머니의 나라인데 진나라가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나는 형제가 많으므로, 군왕께서 돌아가신 다음에는 진나라가 기필코 나를 붙잡아 둘 것이며, 진(晉)나라는 나를 가볍게 여기고 다른 아들로 바꾸어 세울 것이다.”
그러고는 태자 어는 즉시 도망쳐 진(晉)나라로 돌아갔다.
[목공] 23년, 진(晉)나라 혜공이 죽자 태자 어가 자리에 올라 임금이 되었다. 진나라는 어가 도망친 것을 원통해하며 초나라에서 진(晉)나라 공자 중이를 맞아들이고 이전의 태자 어의 아내를 중이에게 시집보냈다. 중이는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나중에는 받아들였다. 목공은 더욱 후한 예로 중이를 대우했다.
[목공] 24년 봄, 진나라가 사람을 보내 진(晉)나라 대신들에게 중이를 입국시키겠다고 알렸다. 진(晉)나라가 이를 허락하니, 사람을 보내 중이를 호송했다. 2월, 중이가 자리에 올라 진(晉)나라의 군주가 되니, 이 사람이 바로 문공(文公)이다. 문공이 사람을 시켜 태자 어를 죽였다. 태자 어가 바로 회공(懷公)이다. 그해 가을, 주나라 양왕의 동생 대(帶)가 적나라의 힘을 빌려 양왕을 공격하자 양왕은 도망쳐 정나라에 거했다.
[목공] 25년, 주나라 왕이 진나라와 진(晉)나라에 사람을 보내 주나라에 난이 일어났음을 알렸다. 진나라 목공은 군대를 이끌고 진(晉)나라 문공을 도와 양왕을 입국시키고 그 동생 대를 죽였다.
[목공] 28년, 진(晉)나라 문공이 성복(城濮)에서 초나라 군대를 쳐부쉈다.
[목공] 30년, 목공이 진(晉)나라 문공을 도와 정나라를 포위했다. 정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목공에게 말했다.
“정나라를 멸망시키고 진(晉)나라를 후하게 대하면, 진(晉)나라는 얻을 것이 있지만 진나라에는 이익이 없습니다. 진(晉)나라가 강대해지면 진나라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이에 목공이 군대를 거두어 돌아왔다. 그러자 진(晉)나라 또한 군대를 거두었다.
[목공] 32년, 겨울에 진(晉)나라 문공이 세상을 떠났다.
정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정나라를 팔아넘기면서 말했다.
“제가 정나라의 성문을 책임지고 있으니, 정나라를 습격할 수 있습니다.”
목공이 건숙과 백리해에게 묻자 그들이 답했다.
“여러 나라를 거쳐 1000리 길을 지나 다른 나라를 습격하는 것은 이득 될 것이 드뭅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이 정나라를 팔았다면, 우리 나라 사람도 우리 사정을 정나라에 몰래 알리지 않을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목공이 말했다.
“그대들은 모르겠으나 나는 이미 결정했소.”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孟明視) 및 건숙의 아들 서걸술(西乞術)과 백을병(白乙丙)에게 군대를 거느리게 했다. 떠나는 날에 백리해와 건숙 두 사람이 통곡했다. 목공이 이 소리를 듣고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출병하는데 그대들이 통곡하며 군대를 가로막으니 무엇 때문이오?”
그러자 두 노인이 말했다.
“신들은 감히 임금의 군대를 가로막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군대가 떠나면 신들의 자식도 함께 가야 합니다. 신은 늙었는데 자식들이 늦게 돌아온다면 서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이 되므로 통곡하는 것입니다.”
두 노인이 물러나 그 자식들에게 말했다.
“너희 군대가 만일 패배한다면, 반드시 효산(殽山)의 요새에서일 것이다.”
[목공] 33년, 봄에 진나라 군사는 동쪽으로 나아가 진(晉)나라 땅을 지나서 주나라의 북문(北門)을 거쳤다. 주나라의 왕손만이 말했다.
“진나라 군대는 무례하니 패하지 않더라도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군대가 활(滑) 땅에 이르렀을 때, 정나라 상인 현고(弦高)가 소 열두 마리를 팔려고 주나라로 끌고 가다가 진나라 군대를 만났다. 현고는 죽거나 포로가 될까 두려운 나머지 그의 소를 바치며 말했다.
“큰 나라가 정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들었는데, 정나라 군주께서는 삼가고 수양하며 지키고 막을 준비를 하시고, 신에게는 소 열두 마리를 끌고 가서 군사들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진나라의 세 장군이 서로서로 말했다.
“습격하려는 것을 정나라가 이미 알아차렸으므로 가더라도 공을 이룸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는 활을 멸했다. 활은 진(晉)나라의 변방 읍이었다.
이때 진(晉)나라 문공이 죽었으나 아직 장사 지내지 못하고 있었다. 태자 양공(襄公)이 성내면서 말했다.
“진나라가 부친을 잃은 나를 무시하여 상을 틈타 우리 활읍을 쳐부쉈다.”
마침내 상복을 검게 물들여 입고 군대를 출동시켜 효산에서 진나라 군대를 가로막아 그들을 크게 무찌르니, 진나라 군대는 한 사람도 달아나지 못했다. 진(晉)나라 군대가 진나라의 세 장수를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이때 문공의 부인이 진나라 여자였으므로 진나라의 세 죄수를 위해 청하여 말했다.
“목공은 이 세 사람에 대한 원망이 뼛속에 사무쳐 있을 것이니, 원컨대 이 세 사람을 돌려보내 그가 통쾌하게 삶아 죽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진(晉)나라 군주가 허락하자 진나라로 세 장수를 돌려보냈다. 세 장수가 돌아오자, 목공은 소복을 입고 교외까지 나와 맞이하고는 세 사람을 향해 울며 말했다.
“내가 백리해와 건숙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세 사람을 욕되게 했으니, 그대 세 사람이 무슨 죄가 있겠소? 그대들은 이 치욕을 씻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나태히 하지 마시오.”
이에 세 사람의 관직과 녹봉을 이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고, 더욱 후하게 대했다.
[목공] 34년, 초나라 태자 상신(商臣)이 부친 성왕(成王)을 시해하고 대신 왕위에 올랐다. 이 틈을 타서 목공은 다시 맹명시 등에게 군대를 이끌고 진(晉)나라를 정벌하게 하여 팽아(彭衙)에서 교전했다. 진나라가 불리해지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융왕(戎王)이 진나라에 유여(由余)를 사신으로 보냈다. 유여는 선조가 진(晉)나라 사람이었는데 도망쳐서 융 땅으로 들어왔기에 진(晉)나라 말을 할 줄 알았다. [융왕은] 목공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유여를 보내 진나라를 살피게 한 것이다. 진나라 목공은 궁실과 쌓아 놓은 재물을 보여 주었다. 유여가 말했다.
“귀신더러 만들어 내라고 하면 귀신도 힘들어할 텐데, 사람들을 시켜 만들게 했으니 백성들 역시 고달팠을 겁니다.”
목공이 그의 말을 괴이하게 여기며 물었다.
“중원은 시, 서, 예, 악, 법도로 나라를 다스리는데도 늘 난이 일어나는데, 지금 융족들은 그런 일이 없으니 무엇으로 다스리는가? 또한 어려움은 없는가?”
유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바로 중원에서 난이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상고 시대의 성인인 황제께서는 예악과 법도를 만드시고 솔선수범하시어 겨우 작은 다스림을 이루었습니다. 그 후대에 이르러서는 군주들이 날로 교만하고 음란해졌습니다. 그들은 법도의 위엄을 믿고서 아랫사람들을 문책하고 감찰했는데, 아랫사람들의 피폐함이 극에 이르면 인의를 베풀지 못한다고 윗사람을 원망하게 됩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다투고 원망하며 서로 찬탈하고 죽이니 멸족에 이르게 되는 것은 모두 이러한 종류의 일 때문입니다. 그러나 융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윗사람은 순박한 덕을 품고서 아랫사람을 대우하고 아랫사람은 충성과 믿음을 가슴에 품고 윗사람을 섬기기에, 한 나라의 정치가 자기 한 몸을 다스리는 것 같아 다스려지는 이유를 알지 못하니 이것이 진정한 성인의 다스림입니다.”
이에 목공은 물러나 내사(內史) 왕료(王廖)에게 물었다.
“내가 듣건대 이웃 나라에 성인이 있으면 적국의 근심거리가 된다고 한다. 지금 유여의 현명함이 나의 해가 되니 장차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자 내사 왕료가 답했다.
“융왕은 외진 곳에 살고 있어 중원의 음악을 들어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왕께서 시험 삼아 그에게 미색이 뛰어난 여악(女樂, 여자 악사)을 보내 그의 마음을 빼앗으십시오. 그런 뒤 그들의 관계가 멀어지도록 유여가 융왕에게 [우리 나라에] 더 머물다 귀국하도록 요청하게 하고는 보내 주지 말고 시일을 놓치게 하십시오. 그러면 융왕이 괴이하게 여겨 틀림없이 유여를 의심할 것입니다. 군신 관계에 틈이 생기면 그를 포로로 삼을 수 있습니다. 또 융왕이 음악을 좋아하게 되면 분명 정치를 게을리할 것입니다.”
그러자 목공이 말했다.
“알겠다.”
이에 목공은 유여와 자리를 잇대어 앉아 그릇을 건네어 서로 먹으면서, 융족의 지형과 군대에 대해 물어봐 거의 알아내고, 나중에 내사 왕료에게 영을 내려 여자 악사 열여섯 명을 융왕에게 보내게 했다. 융왕은 받고 기뻐하며 여생을 마칠 때까지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에 진나라는 곧 유여를 돌아가게 했다. 유여가 [융왕에게]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듣지 않는 데다 목공이 여러 번 사람을 보내 몰래 유여를 초빙하니, 유여는 마침내 [융을] 떠나서 진나라에 투항했다. 목공은 빈객의 예로 그를 대우하고, 융족을 정벌할 형세에 대해 물었다.
[목공] 36년, 목공은 다시 맹명시 등을 더욱 후대한 후, 그들에게 군대를 이끌고 진(晉)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맹명시 등은] 하수를 건넌 뒤 타고 온 배를 태워 버리고 나서 진(晉)나라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왕관(王官)과 호(鄗)를 빼앗아 효산의 패배를 설욕했다. 진(晉)나라 사람들은 모두 성을 지키며 감히 나오지 않았다. 이에 목공은 모진(茅津)에서 하수를 건너 효산에 있는 시신의 묘지를 만들어 장사 지내면서 사흘 동안 곡했다. 그러고는 진나라 군대에게 맹세하며 말했다.
“아! 병사들이여! 떠들지 말고 잘 들어라. 나, 너희에게 맹세하여 알리노라. 옛사람들은 일을 도모함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의견을 따랐으므로 과오가 없었다. 건숙과 백리해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거듭 생각하여 이 맹세를 하므로, 후세에 기록하여 내 과오를 알리라.”
군자들이 이 소문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 진나라 목공은 사람을 쓸 때 이토록 용의주도하니, 결국 맹명시가 승리의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목공] 37년, 진나라는 유여의 계책을 받아들여 융왕을 정벌하고, 나라 열둘을 더하여 속국으로 삼았으며, 1000리의 땅을 개척하여 마침내 서융 지역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천자가 소공과(召公過)를 보내 목공에게 금으로 된 북으로 축하했다.
[목공] 39년, 목공이 죽자 옹 땅에 안장했다. 따라 죽은 사람이 177명이었는데, 진나라의 충신 엄식(俺息), 중항(仲行), 침호(鍼虎)라는 이름의 자여씨(子輿氏) 세 사람도 따라 죽은 사람 가운데 있었다. 진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애도하여 「황조(黃鳥)」라는 시를 지어 노래했다. 군자들이 말했다.
“진나라 목공은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더하여 동쪽으로는 강력한 진(晉)나라를 복종시키고, 서쪽으로는 융족의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제후들의 맹주가 될 수 없었던 것 또한 당연하다. 죽어서 백성들을 버렸는데, 어진 신하를 모아서 따라 죽게 했으니 말이다. 그의 선왕은 세상을 떠났을 때 오히려 여전히 덕을 남기고 법도를 드리우게 했는데 하물며 선량한 사람과 어진 신하를 빼앗았으니 백성들이 슬퍼하는 바가 되었구나! 이로써 진나라가 더는 동쪽을 정벌할 수 없을 것임을 알겠다.”
목공은 아들이 마흔 명이었는데, 태자 앵(罃)이 대신 자리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강공(康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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